10월 말 서울 성수동의 한 카페가 “중국인 손님은 받지 않는다”고 공지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큰 논란이 됐다. 카페 주인은 언론에 “중국인 손님이 오면 한국인 손님들의 분위기가 너무 달라져 버린다”고 중국인 출입 금지를 공지한 이유를 밝혔다. 이 일이 보도된 후 인종차별 논란이 일었고 성동구청장까지 나서 설득을 하자 결국 주인은 결국 ‘중국인 출입 금지’ 결정을 철회했다.
이 사건에서 가장 놀라운 건 많은 사람이 중국인 출입 금지를 옹호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중국인들은 ‘시끄럽다’, ‘주변에 민폐를 끼친다’ 같은 이유를 대면서 중국인 출입 금지는 정당하고 절대 비난받을 일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우리 사회에 특정 집단, 민족, 국적자에 대한 개인의 차별을 처벌할 법적 근거는 없다. 하지만 개인이 경험하는 불편함이나 경제적 이익 문제가 있더라도 특정 정체성을 이유로 누군가의 출입을 제한하는 건 명백하게 차별이다. 세계 어디에서도 국적이나 민족 배경을 이유로 카페나 식당 출입을 금지하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이는 과거 미국에서 식당이나 공공시설에 흑인 출입을 금지했던 것과 다를 바 없다.
인종차별은 흑인에 대한 차별을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이제는 특정 인종, 민족, 국적, 문화 등의 배경을 가진 집단이나 개인에 대한 차별을 의미하는 포괄적 단어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모든 차별은 혐오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인종차별은 어떤 이유에서든, 어떤 민족이나 국적을 대상으로 하든 인류가 공유하는 보편적 윤리의 기준에 따라 절대로 허용되지 않는다. 찬.반 논란의 주제가 될 수 없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에서 중국인 차별과 관련해 찬.반 논란이 일어난 건 인종차별과 혐오에 대한 우리 사회의 왜곡된 인식을 잘 보여준다.
중국인 출입 금지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원인을 제공한 건 중국인들이라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중국인이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시끄럽고 주변에 폐를 끼치는 중국인들이 많은 건 사실이라고 주장하고 싶을 것이다. 그런 이유라면 많은 한국인도 국내, 또는 해외에서 출입 금지를 당할 이유가 충분하다. 국내든 해외든 한국인 단체 손님들이나 관광객들이 시끄럽게 구는 건 자주 목격되는 일이고 상식 밖의 행동을 하는 사람들도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일반화가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고 같은 맥락에서 중국인들에 대한 일반화 또한 정당하지 않다.
일반화의 오류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중국인 출입 금지를 옹호한 건 우리 사회에 이른바 ‘혐중’이라고 불리는 반중 정서와 중국인 혐오가 인종차별까지 정당화하는 위험한 수준으로 확산했음을 보여준다. 혐중을 정당화하기 위한 조작 정보와 근거 없는 주장의 의도적인 확산까지 더해져 혐중은 한층 강화되고 있다. 이는 중국인에 대한 차별을 야기한게 중국인들이 아니라 오래 전에 시작됐고 코로나19와 비상계엄 뒤의 정국을 지나면서 우리 사회에서 확산한 반중 정서, 나아가 혐중의 심화임을 말해준다. 그리고 이 문제의 핵심은 우리 사회가 어떤 인종, 민족, 국적 배경을 가졌든 누구도 차별하고 혐오해서는 안 된다는 세계의 보편적 윤리와 상식에 반하는 일을 찬.반 또는 개인적 선호의 문제로 호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맥락에서 혐중은 단순히 우리 사회 문제가 아니라 세계의 문제이고 세계시민의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2024년 7월 말부터 8월 초에 영국에서는 10일 이상 난민과 이주민에 반대하는 폭동이 일어났다. 문제의 발단은 7월 29일 영국 서북부 한 소도시의 무용학원에서 괴한이 6세, 7세, 9세의 어린이를 칼로 찔러 살해하고 어린이 8명과 성인 2명에게 부상을 입힌 사건이었다. 사건 직후 범인이 17세 무슬림 난민 소년이라는 소문이 급속히 사회관계망을 통해 확산했다. 경찰과 언론은 범인이 영국에서 태어난 미성년자라고 밝혔으나 소문은 가라앉지 않았다. 그리고 사건 다음날부터 난민과 이주민에 반대하는 폭동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이들은 모스크, 난민 신청자 숙소, 아시아인 소유 자동차와 가게, 경찰차 등을 부수고 불을 지르고 약탈했다. 극우 인사들은 사회관계망에 계속 거짓 정보를 올려 시위자들을 선동했고 공격 목표를 정해 퍼뜨리기도 했다. 전국적으로 10일 이상 계속된 폭동을 야기한 건 비극적인 사건이 아니라 난민과 이주민에 대한 혐오였다.
2024년 9월 미국 대선 토론에서 당시 후보였던 트럼프는 오하이오에서 아이티 출신 이민자들이 개와 고양이 같은 반려동물을 먹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난민과 이주민을 혐오하는 극우 성향 지지자들이 퍼뜨린 주장으로 주정부가 이미 사실 확인을 통해 거짓이라고 밝힌 것이었다. 트럼프는 2016년 대선 때도 멕시코계 이민자를 아무런 근거도 없이 ‘성폭행범’이라고 불렀다. 이런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된 건 미국 사회에 확산한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가 심각한 수준임을 보여줬다. 이 역시 난민과 이주민이 문제가 아니라 극우 및 보수 성향 미국인들의 난민과 이주민에 대한 혐오가 문제였다.
영국의 폭동, 트럼프의 거짓 주장 등은 모두 근본적인 문제가 혐오와 차별의 대상이 된 사람들이 아니라 그들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정당화하는 사람들임을 보여준 것이었다. 우리 사회에서 번지고 있는 중국인 혐오처럼 말이다. 특정 집단에 대한 이런 혐오와 차별은 영국과 미국에서만 문제가 되는 건 아니다. 2015년 이후 유럽 내 시리아 난민이 급증하면서 유럽 국가들에서는 난민과 이주민에 대한 혐오가 높아졌다. 러시아-우크라이나 간 전쟁이 길어지면서 우크라이나 난민에 대한 혐오도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훨씬 많은 사람이 인종, 민족, 국가, 문화 등 어떤 이유에서든 누구도 혐오와 차별의 대상이 되지 않아야 한다는 보편적 윤리, 원칙, 상식을 지키고 있다. 동시에 그것이 세계시민으로서 반드시 가져야 하는 입장, 태도, 가치, 행동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많은 사람이 우리의 반중 정서와 혐오는 우리와 중국과의 특수한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듯하다. 중국인에 대한 노골적인 공격과 혐오, 서울의 명동과 대림동, 그리고 수원과 안산 등에서 벌어지는 혐중 집회 등도 우리와 중국 간 관계를 고려할 때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그리고 그것이 ‘표현의 자유’기 때문에 집회가 허용되는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런데 집회가 허용되는 건 적용할 적절한 법이 없는 법적 공백 때문이고 도시 한복판에서 증오와 공격의 말을 내뱉는 건 세계시민의 보편적 윤리와 상식 차원에서는 어디에서도 허용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의 혐중 시위는 국제 뉴스에서 다뤄질 수도 있다.
많은 사람이 혐중은 특별한 사례고 그것이 우리 사회에 크게 부정적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고 착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노골적인 혐중은 우리 사회에서 특정 집단이나 배경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혐오와 차별의 확산과 함께 나타난 것이다. 이주노동자, 난민, 빈곤층, 장애인, 육체노동자, 성소수자 등을 겨냥한 혐오와 사회적 민감성 부재가 결국 혐중의 확산까지 가져온 것이다. 이는 곧 누가 대상이든 혐오가 확산하면 결국 많은 사회 집단과 개인이 이유만 다를 뿐 혐오에 노출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혐오는 전염병처럼 위험하고 그러므로 혐오가 만연한 사회는 매우 위험하다. 사회가, 국가가, 집단이 한 집단이나 특정인에 대한 혐오를 허용하면 다른 집단이나 개인에 대한 혐오도 쉽게 생기게 된다. 그리고 이는 국가의 경계를 넘어 세계의 다양한 집단과 개인에 대한 혐오의 확산으로도 이어지게 된다. 이는 혐중에 동조하지 않는 것에서 자신의 윤리성과 세계시민성에 대한 자신감과 위안을 느끼는 것을 넘어 세계시민으로서 모든 혐오와 차별을 강하게 거부해야 한다는 점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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