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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송전탑 완료, 갈등 끝?평화갈등 이야기 /갈등해결 2014. 9. 24. 00:00
경남 밀양 5개 면의 송전탑 69기의 조립이 완료됐다. 한전은 11월 말까지 송전탑과 송전탑 사이에 전력선을 연결하는 공사를 끝내고 12월 초엔 신고리원전 1, 2호기에서 생산한 전기를 시험 송전할 것이라고 밝혔다. 계획보다 4년 늦게 완료된 것이다. 한전으로서는 안도의 숨을 내쉴만 하다. 송전탑 건설이 끝났으니 한전은 수년 동안 전국을 뒤흔들었던 밀양 송전탑 건설 갈등도 이제 끝났다고 기대할 것이다. 아직은 주민들이 "끝까지 싸울 것"이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지만 그렇다고 건설된 송전탑을 뽑아버릴 수는 없을테니 결국 갈등은 이제 일단락 된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과연 그럴까?
대부분의 갈등은 다섯 단계를 거쳐 진행된다. 첫 단계는 <갈등 이전> 단계로 아직은 문제가 드러나지 않고 당사자들 사이의 대립도 본격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때다. 둘째 단계는 <대결>로 갈등이 밖으로 표출되고 당사자들 사이에 노골적인 대립 관계가 형성되는 때다. 셋째 단계는 <위기>로 대립이 극에 달해 갈등이 확산되고 그로 인해 양쪽 사이의 대화와 관계가 완전 단절되는 때다. 지난 몇 년간 밀양 주민들과 한전과의 대립이 극게 달한 것이 바로 이 <위기> 단계에 해당된다. <위기>가 지나면 자연스럽게 <결말> 단계에 이르게 된다. 현재 밀양 주민들과 한전이 처한 상황이 바로 이 <결말> 단계다. 이 단계가 되면 당사자들은 갈등을 계속할 것이지 일단락 지을 것인지를 선택하게 된다. 합의로 갈등을 끝내든지, 협상을 하든지, 아니면 한 쪽이 다른 쪽의 요구를 수용하든지 또는 싸움을 포기하든지 등등의 선택이 있을 수 있다. 때로 강력한 제3자가 강제로 갈등을 종료시키는 일로 결말이 나기도 한다. 마지막 단계는 <갈등 이후>다. 이 단계에서는 갈등이 해결돼 대결이 사그라들고 관계가 예전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나 갈등 현안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고 만족하지 못하는 당사자가 있으면 갈등은 다시 처음 단계, 다시 말해 <갈등 이전>으로 돌아가 다른 갈등을 낳게 된다. 현재 밀양 송전탑 갈등이 도달한 <결말> 단계는 갈등이 해결될 수도, 또는 다른 갈등을 낳게될 수도 있는 중요한 단계다. 이 다섯 개의 단계는 순차적으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넘어가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기도 하고, 두 개의 단계가 오랜 시간 반복되기도 한다. 사람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이 수학 공식처럼 진행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송전탑 조립을 끝낸 한전이 기대하는 것은 분명 밀양 주민들이 되돌릴 수 없는 현실을 인정하고 포기하는 것일 게다. 그리고 일단 위기는 넘겼으니 어떤 식의 결말이 되든 한전은 손해볼 것이 없는 셈이다. 그저 주민들이 포기하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지만 <결말> 단계에서는 다른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상대적으로 약한 당사자가 포기하거나 굴복하지 않고 이 단계를 숨고르기와 장기 전략을 세우는 기회로 삼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갈등이 자연스럽게 사그라드는 것이 아니라 다시 갈등이 <위기>로 회귀할 수도 있게 된다. 현재 밀양 송전탑 갈등의 상황이 바로 이 형국이다. 송전탑 조립이 끝나 이제 한전은 한시름 놓고 '시간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느긋해하고 있다. 그러나 밀양 주민들은 "싸움이 끝나지 않았다"고 얘기하고 "한전이 주민들에게 가한 폭력과 불이익에 대한 응분의 대가를 치르는 날까지 싸울 것"이라고 다짐하고 있다. 그러니 갈등은 끝난 것이 아니고, 위기가 지났다고 자연스럽게 사그라지지도 않을 것이다. 그냥 사라지는 갈등은 없다.
밀양 송전탑 갈등의 근본원인이자 핵심 현안은 '불의'다. 주민들의 동의 없는 송전탑 건설 결정과 강행, 비용 문제로 인한 지중화 거부, 도시 전기 소비를 위한 농촌 지역의 희생 등 모든 것이 밀양 주민들에게는 너무나 부당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한전이라는 공공기관이 공공이익을 들먹이며 강행한 일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일반 기업이라면 욕 한번 찐하게 하고 돌아서서 불매 거부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공공기관에게는 그럴 수도 없다. 속이 뒤집어질 정도로 미워도 어쨌든 그 공공기관이 제공하는 서비스를 이용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에 더 미칠 노릇이다. 그러니 공공기관과의 갈등은 더 복잡하고 다면적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불의'의 문제를 더 질기게 제기할 수밖에 없다. 이 말은 '불의'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한 갈등이 해결될 수 없다는 얘기다. 한전이 생각하는 것처럼 송전탑 건설 종료가 갈등의 끝이 될 수 없단 얘기다.
'불의'를 다룬다는 것은 과거를 다룬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곧 한전의 과거를 다룬다는 것을 의미한다. 밀양 송전탑 문제의 경우 과거는 먼 옛날의 일이 아니다. 바로 어제나 지난 달, 그리고 작년에 있었던 일이 다뤄야 할 과거가 될 것이다. 물론 갈등의 상대편인 한전이 큰 결단을 하고 과거를 다루는 일에 적극 협조한다면 과거와 불의를 다루는 일은 훨씬 쉬워지고 갈등은 예상보다 빨리 해결될 수도 있다. 물론 대다수의 사람들은 기대하기 힘든 일이라고 말할 것이다. 솔직히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지만 과거를 다루는 일에 어떤 식으로든 한전이 관계될 수밖에 없다면 차라리 적극 협조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과거를 다루는 것은 한전에게도 손해나는 일이 아니다. 한전은 지금도 곳곳에서 송전탑 건설 문제로 주민들과 갈등을 겪고 있고 밀양 송전탑 문제로 생긴 국민적 불신과 원성이 다른 곳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밀양에서 한 점이라도 뼈아픈 교훈을 얻었다면 솔직해지는 것이 낫다는 얘기다.
그런데 과거의 불의를 다루는 것보다 현재 가장 중요한 것은 밀양 주민들이 가지게 됐을 허탈함과 상처를 치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듣건말건 상관없이 한전이 공공기관으로서 국민들에게 깊은 상처를 냈다는 점을 목소리 높여 얘기하는 것이다. 송전탑 조립 완성이, 그리고 몇 달 후의 송전이 갈등의 끝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얘기하는 것이다. 당사자가 끝났다고 할 때까지 갈등은 끝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전에게 계속 과거의 불의를 얘기하고 갈등이 끝나지 않았다고 얘기하는 것은 결국 갈등을 제대로 끝낼 기회를 주는 것이기도 하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공공기관은 시민들과 이런저런 갈등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안고 있지만 힘으로 갈등을 방치하고 봉합하는 것은 운명이 아니라 선택이다. 그렇지만 대한민국의 공공기관은 그것이 마치 운명인냥 얘기하면서 자신이 한 일을 정당화하는데 주력한다. 그런 태도와 행동이 결국 갈등을 확대시키고 악화시키는데 기여하는데도 말이다. 우리는 공공기관이 그런 태도를 바꿀 때까지 계속 그것이 잘못됐다고 얘기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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