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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 원전 투표, 갈등은 커간다평화갈등 이야기 /갈등해결 2014. 10. 20. 00:00
삼척 원전 유치 주민 투표 결과가 나온지 일주일 이상이 지났다. 지금까지 정부는 결과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태도를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관련부처인 산업부는 국감장에서 "주민 투표는 법적 효력이 없다"며 삼척 원전은 "적법한 절차로 결정된 사안"이라는 입장을 되풀이했다. 정책과 관련된 갈등 사안에 대한 정부와 공공기관의 전형적이고 흔히 볼 수 있는 대응 태도다. 정부와 공공기관이 이런 태도를 보이는 이유는 갈등이 저절로 사그라들기를 바라는 마음이 반영된 것이다. 자신들이 대응하면 오히려 벌집 쑤시는 꼴이 될 수 있고, 그러면 일이 더 복잡해지기 때문에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거나 초반에 쐐기를 박아두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문제를 제기하는 시민들이 에너지를 소진한 후 제풀에 나가 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번 삼척 원전 유치 반대 결과는 다른 경우와는 다르다. 단순히 반대 의사를 표현한 것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증명가능한 방법으로 의사를 표현하고 구체적인 수치까지 제시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정부와 관련 부처가 딴 소리를 못하게 만든 것이다. 때문에 정부는 물론 누구도 그 결과를 무시하기 힘든 상황이 됐다. 그럼에도 정부가 '법적 효율성'과 '적법한 절차'를 들먹이며 투표 결과를 거부하는 이유는 그것이 원전 사업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그 자체로 모순을 안고 있다. 애초 정부가 삼척을 원전건설 예정지역으로 고시할 때 근거로 내세운 것이 주민 찬성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산업부가 제시한 96.9%라는 경이로운 숫자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기본적인 논리는 원전 유치는 주민 찬성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연유든 주민들의 마음이 바뀌어 싫다고 하면 그것도 받아들여져야 한다. 건물 하나 세우거나 다리 하나 만드는 것도 아니고 대대손손 영향을 받게 될 원전인데 겨우 두 해 지나 마음을 바꾼 것이 그렇게 이상한 일도 아닌데 말이다. 더군다나 그동안 일어났던 후쿠시마 원전사고나 원전 비리 사건 등을 고려하면 말이다. 그런데도 정부와 공공기관이 자신들에게 유리할 때만 주민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불리할 때는 객관적 증거를 제시해도 주민들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없는 일이다.
삼척 주민 투표 결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진지하게 고려돼야 한다. 하나는 갈등의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장기적인 원전 건설 사업과 관련해서다. 첫째로 갈등과 관련해서 생각해보자면 가장 우려되는 점은 투표 결과를 묵살한다면 더 큰 갈등을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비록 지금까지 정부와 공공기관이 제대로 갈등을 해결해본 적도 없고, 오히려 갈등을 부추기고 악화시킨 일이 더 많지만 이번 일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폭발력이 큰 문제기 때문에 다른 갈등 사안처럼 대응하면 곤란하다. 투표 결과가 보여주듯 이것은 삼척 시민 전체가 안전 문제를 스스로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현한 문제다. 법적 효율성이 없는 투표임을 알면서도 시민들이 적극 참여한 것을 보면 시민들의 의지를 더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러니 정부가 결과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진정성 있는 태도로 대응하지 않는다면 정부에 대한 불신은 더 커지고 문제는 심각한 갈등으로 진화될 것이다. 원전이라는 문제가 갖는 폭발력도 간과할 수 없다. 원전은 대부분의 선진 사회에서 가장 민감한 문제 중 하나이고 우리나라도 이제 시민 의식이 그 수준에 도달했다. 원전에 대한 찬반 의견은 예전에는 정치적 성향이나 가치의 문제로 취급됐지만 이제는 삶의 안전 문제가 됐고 비정치적 문제로 진화했다. 이것은 한국 사회에서 원전 문제가 대중의 주요한 관심사가 됐으며 때문에 문제를 더 이상 소홀히 다룰 수 없게 됐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정부는 갈등을 확대시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투표 결과에 적극 대응하고 적어도 그 결과를 가지고 고심하는 태도는 보여줘야 한다. 주민들의 의사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결정을 처음부터 다시 검토하지 않으면 안된다. 정부는 지금까지 갈등 대응과 관련해 무감각과 무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했지만 이번만큼은 그런 방식으로 대응할 일이 아니다.
둘째로 원전 건설과 관련해 장기적 계획의 재검토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삼척 시민들이 원전에 반대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일 것이다. 그렇지만 정부의 감시 소홀, 한수원의 운영 비리, 얽히고설킨 유착관계 등 최근 1-2년 사이 드러난 온갖 문제점들로 인해 불안감은 더욱 높아졌을 것이다. 원전 운영과 관련해 이런 문제점들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계속 폭탄을 안고 사는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고 삼척 시민들은 누구보다도 그런 문제를 민감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원전과 관련된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는 접근이 필요하다. 이 좁은 땅에 원전이 반드시 필요한지, 불가피하게 필요하다면 몇 개가 적절한지, 그 원전들을 가장 안전하게 관리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등에 대한 질문이 이뤄져야 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정부 차원의, 그리고 시민들이 참여하는 절차가 마련되지 않으면 정부는 앞으로 단 한 기의 원전도 짓기 힘들 것이고 단 한기의 원전도 제대로 운영하기 힘들 것이다. 다시 말해 지금은 원전의 필요 여부와 관리 가능한 숫자 등등에 대한 국민적 합의가 마련돼야 한다는 얘기다. 삼척 주민 투표는 고맙게도 그런 고민을 하도록 정부를 자극한 것이다.
갈등해결 연구의 시각에서 볼 때 삼척 주민 투표 결과와 원전 문제를 다루는 방식은 원칙에 충실하는 것이다. 원전이 모두의 문제이기 때문에 국민 모두와 함께 대응하는 원칙을 따를 수밖에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 국민의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이 마련돼야 하고, 에너지 정책에 대한 정보 공유가 이뤄져야 하며, 미래에 대한 결정을 국민 모두가 함께 내려야 한다. 이를 위해 보다 구체적인 방법을 생각하자면 정부, 공공기관, 시민, 시민단체, 학계, 관련업계 등 관련된 분야와 국민들이 모두 참여하는 원탁회의나 정책대화 같은 것이 마련돼야 한다. 그리고 직접 참여하지 못하는 국민들의 감시가 이뤄질 수 있도록 그 과정과 논의가 모두 공개돼야 한다. 너무 복잡해서 지나치게 이상적인 것 같지만 이미 다른 나라들에서는 실행됐던 일이고 지금도 세계 어딘가에서는 이뤄지고 있을 일이다. 이것은 단순하게는 향후 폭발할 더 큰 갈등을 막는 일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하게는 갈등을 초래하지 않고 우리 사회의 미래를 계획하는 일이다. 물론 이 일을 시작해야 하는 것은 정부다. 문제는 정부가 이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인데....삼척 투표를 계기로 정부에 대한 시민들의 압력 강도를 높이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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