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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 속의 한국인, 나는 누구?평화갈등 이야기 /갈등해결 2015. 1. 23. 00:00
최근 인상 깊었던 TV 드라마가 있었다. '피노키오'다. 재미도 있었지만 언론의 문제를 깊이 있게 짚어내 대중 드라마답지 않은 포스를 내뿜었다. 특별히 눈길을 끈 것은 등장인물들이 불의를 대하는 태도와 행동이었다. 너무나 이상적이어서 현실이어야 하지만 왠지 현실적이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들이 가까운 사람들, 그것도 엄마와 형 같은 가족과 관련된 불의를 과감하게 만천하에 밝히는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양심과 정의가 우선이다. 그렇다고 가족을 포기한 것은 아니고, 드라마인지라 그렇게 되지도 않았다. 불의를 저지른 쪽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불의를 고발하는 가족의 행동을 인정해줬기 때문이다. 아주 따뜻한 얘기지만 한국사회에서 실제로는 접하기 힘든 얘기다. '드라마는 드라마일뿐'인 것이다.
한국인에게 가족은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가족이 개인의 정체성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자신의 정체성 형성에 어떤 집단이나 사람이 가장 영향을 미쳤는지 물어보면 많은 사람들이 가족, 또는 특정하게 부모를 꼽는다. 어렸을 때부터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기도 하지만, 특이한 것은 성인이 되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족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곧 가족이 정체성 형성과 변화에 계속 영향을 미치고, 사회적 역할과 행동에도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한국인이 가족에 큰 의미를 두고, 집착까지 하는 이유는 소속 집단을 중요하게 여기는 집단주의 문화 성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성향은 가족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가족만큼은 아니지만 한국인들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소속된 집단과도 '운명적'으로 강한 유대 관계를 형성한다. 소속 집단 또한 개인의 정체성 형성에 영향을 미치고 다른 한편 안정감을 준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소속 집단에 의해 소외되거나 내쳐지는 것을 가장 두려워한다.
어쨌든 한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가족이나 또는 소속 집단과의 강한 유대는 개인의 삶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기도 하지만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많다. 특별히 갈등과 관련해서 그렇다. 가족이나 소속집단은 흔히 갈등의 진원지가 된다. 가족 및 소속 집단 내 사람들과는 깊은 관계가 형성되기 때문에 오히려 이런저런 일로 갈등이 많이 생기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깊은 유대가 갈등에 대한 개인의 대응을 아주 제한적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먼저 갈등에 직면한 사람은 절대 당당할 수가 없다. 죄인 취급을 받기도 하고, 스스로 그렇게 느끼기도 한다. 갈등으로 인해 집단 내에 잡음을 만들고 조화를 깨뜨렸다고 자타가 인식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갈등에 정면 대응할 수도 없다. 아무도 없는 옥상에서 욕을 한 바가지 내뱉거나 벽을 치며 분노할망정 대놓고 감정을 드러낼 수가 없다. 물론 수양하듯 조용하게 인내하는 사람도 있지만 말이다. 어쨌든 소속 집단과 유대감이 강할수록 개인이 주체적으로 갈등을 직면하고 대응할 가능성은 줄어든다.
가족이나 소속 집단과의 강한 유대감이 갈등과 관련해 가져오는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옳고 그름을 따지기 힘들게 만든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불의'를 지적하고 '정의'를 주장하기 힘들어진단 얘기다. 특별히 다른 집단 또는 다른 집단의 구성원들과 문제가 생겼을 때는 더욱 그렇다. 이른바 '제 식구 감싸기'가 작동하게 되는 것이다. '제 식구'가 본래 의미하는 것은 가족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소속된 집단도 준 가족 정도로 생각한다. 자신의 정체성과 관련이 있고 사회적 안전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은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신의 집단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설사 자신의 집단이 갈등 관계인 다른 집단에게 법적, 도덕적으로 절대 용인될 수 없는 못된 짓을 했어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곧 자신의 정체성과 불화하지 않고 현재의 안전과 미래의 번영을 보장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의는 무슨...개나 줘버려!''라는 식의 대응이 나오는 것이다.
다시 드라마 '피노키오'의 얘기로 돌아가 보자. 지금까지 얘기한 집단 속의 한국인, 소속 집단이 개인 정체성 형성에 미치는 영향, 집단 보호 의식, 집단 속 개인의 갈등 대응 등을 본다면 불의를 저지른 가족에 대한 등장인물들의 태도와 행동은 한국인의 일반적 정서와 행동을 많이 벗어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라마는 인기를 얻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대응을 지지했다는 얘기다. 그런데 그것이 자신의 얘기가 된다면? 살인범인 형에게 자수를 권하고, 사실을 왜곡한 기자 엄마를 고발하고, 권력을 이용해 언론을 농단하고 위협한 사업가 엄마를 단죄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한국문화 안에서는 가족과 자기 집단의 불의를 눈감아주고, 심지어 정당화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기는 정서가 인정된다. 그리고 그것이 '싸가지' 있는 행동이라고 정당화된다. 당사자들도 이성적 판단과 정서적 선택을 분리시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한다. 이런 이중적 기준과 정서를 극복하고 새로운 기준을 세우는 것이 한국사회와 개인이 직면한 가장 큰 도전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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