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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튀기는 영화의 미학?평화갈등 이야기 /평화 2014. 4. 15. 00:00
범죄 수사극이 대세인 세상이다. 인기의 시작이 어딘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CSI가 상당한 영향을 줬을 것이라 생각된다. CSI는 과학적인 범죄 수사와 피해 현장 및 상황의 디테일을 독특하게 보여주는 촬영 기법 때문에 단번에 사람들의 시선을 잡았다. 한국 시청자들도 열광했고 그래서 하루 종일 몰아 볼 수 있는 CSI Day 같은 것도 생겼다. 아무튼 그후 많은 범죄 수사 드라마가 나왔고 한국에도 상당히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제 한국도 제법 완성도 높은 범죄 수사 드라마를 만들어내고 있다.
범죄 수사 드라마의 특징은 항상 죽는 사람이 나온다는 것이다. 물론 피의 흔적도 피해갈 수는 없다. 이런 장르가 유행하는 것은 사람들의 불안한 심리를 반영한다는 얘기도 있다. 자극적인 것에 길들여진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갈수록 드라마 속 범죄의 강도가 높아지는 것 같기도 하다. 이제는 질끈 눈을 감아야 하는 참혹한 범죄 현장 장면도 포함되고 피를 부르는 상황도 갈수록 교묘해지고 있다. 그럼에도 드라마는 그 나름의 원칙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 TV라는 매체에 방영되고 다수의 시청자를 상대하는 것이기에 아무리 흉악한 범죄도 설명이 될 수 있어야 하고 피의 흔적도 지나치게 선정적이어서는 안 된다. 나름의 정당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얘기다. 그래서 범죄 수사 드라마는 범죄자의 인간성 상실, 범죄자를 만드는 사회 구조와 환경, 인간에 대한 연민 등의 얘기를 장식으로라도 꼭 끼워 넣는다. 그런 장치들이 없다면 범죄 수사 드라마는 어떤 이유가 됐건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포기한 제정신 아닌 인간들의 폭력을 정당화해주는 꼴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드라마와는 다르다. 한 마디로 쎄다. 영화에서는 범죄도 범죄자도 훨씬 더 흉악하다. 때로는 그냥 미친 짓일 때도 있다. 범죄와 범죄자의 정당성이 설명되지 않는 것이다. 돈 주고 영화를 선택한 관객만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굳이 길게 설명하지도 않는다. 영화에서는 범죄자뿐만 아니라 '좋은 놈'의 행동도 쎄다. 영화배우 원빈을 이상형 아저씨로 등극시킨 영화 '아저씨'를 보고 경악했던 기억이 있다. 범죄자들의 폭력은 눈을 질끈 감게 만들 정도로 소름끼쳤고 '좋은 놈'으로 포장된 원빈의 피 튀기는 반격 또한 범죄자의 폭력에 뒤지지 않았다. 뒤늦게 그 영화를 케이블 방송에서 보고 밤새 악몽을 꾸었다. 로맨스 영화인줄 알고 봤던 "쩨쩨한 로맨스'도 내 뒤통수를 쳤다. 극장에서 보지 못해 케이블 방송에서 한다기에 챙겨 봤는데 영화에 삽입된 만화를 차용한 영상이 심장에 충격을 줄 정도로 과격했다. 사람을 난도질하는 만화 컷들이 너무 생생해서 눈을 질끈 감지 않을 수 없었다.
영화에 폭력적 장면이 허용되는 이유는 예술 행위라는 명분 때문이다. 한 마디로 미학적으로 가치가 있음을 인정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때로 영화에는 설명되지 않고 정당성도 없는 폭력적인 장면들이 방황하는 청소년기 아이들의 치기어린 반항처럼, 그리고 불안한 어른들의 분노처럼 생각없이 들어가 있는 경우도 많다. 최근에는 살인, 폭행, 폭언, 총기 난사, 칼부림 등이 필수 양념처럼 들어가 있고, 그런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변명은 궁색하기 그지 없고 오히려 그런 행동 자체를 멋지게 포장하는 경우도 많다. 한국 영화에 삽입되는 폭력 정도는 그런 영화의 원조격이라 할 수 있는 할리우드 영화보다 심한 정도가 됐다. 오히려 할리우드 영화는 미국사회의 보수적 성향을 반영해서인지 관객층이 제한돼 있는 B급 영화나 컬트 영화를 제외하고는 폭력의 정도가 우리 영화보다 지나치지 않다. 총싸움과 폭파 장면 등이 대부분이다. 그렇지만 '조폭 영화'라는 이상한 장르를 만들어낸 한국 영화의 '힘'에 기대 한국 영화에서는 오히려 폭력의 디테일이 강조되고 미화되며 폭력를 행사하는 사람들조차 멋진 인간으로 포장되는 일이 흔하다. 조폭 영화의 영향 때문인지 조폭을 동경까지 하는 청소년들이 많이 생겼다는 얘기는 입을 쩍 벌어지게 만든다.
전쟁 영화의 주요 주제는 폭력이다. 병사들은 물론 민간인들도 생존을 위해, 그리고 조국을 지킨다는 명문으로 양심의 가책없이 적을 죽이는 일을 저지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전쟁에서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영화는 거의 없다. 전쟁이 인간성의 상실을 야기하는 가장 비인간적이고 극단적인 폭력 상황으로, 개인은 국가와 구조의 희생양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범죄 영화와 조폭 영화, 그리고 다른 영화에도 자주 등장하는 폭력은 그 수준과 방법에 있어 전쟁 영화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음에도 전쟁 영화의 폭력처럼 성찰을 허락하지 않는다. 영상미를 추구한다는 명분으로 살인과 폭행의 장면은 더욱 사실적이고 과감해지며 폭력의 가해자는 정의를 위해 싸우는 영웅으로 그려지곤 한다. 영화라는 예술 영역의 특수성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단지 관객의 말초 신경을 자극하기 위해 피 튀기는 폭력을 예술로 미화하는 영화는 스스로 표현의 한계와 능력의 부재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문제는 그런 영화에 익숙해지고 중독돼가고 있는 우리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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