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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연구의 평화, 한반도의 평화평화갈등 이야기 /평화 2014. 3. 27. 00:00
어제가 천안함 사건 4주기였단다. 이날을 맞아 남한은 북한의 '유죄'를 재확인했고 북한은 다시 '무죄'를 주장했다. 아직도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아 여전히 풀지 못한 숙제로 남아 있지만 분명한 한 가지는 천안함 사건이 마치 '제 2의 한국전쟁'처럼 적대적인 남북관계의 상징이 되고 관계 개선에 치명적 장애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전쟁과 다른 점은 천안함 사건은 우리 사회에 가장 신선한 최근의 집단 기억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집단 기억은 흔히 '살아 있는 역사' 역할을 하며 수시로 존재 가치를 드러낸다. 적대 관계, 또는 갈등 관계에 처해 있는 집단들은 상대가 미울 때마다 이 '살아 있는 역사'를 들먹이며 상대의 비인간성과 비도덕성을 강조하고 증오심을 다진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천안함 사건은 계속되는 남북 사이의 대립과 증오를 정당화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다. 두려운 것은 이 '살아 있는 역사'가 해마다 등장하면서 존재 가치를 확실히 증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남북은 대립과 증오에도 불구하고 항상 관계 개선을 천명해오고 있다. 거기에는 대체적으로 두 가지 배경이 작용한다. 하나는 남북관계 개선이 정권과 통치자에게 지워진 숙명과도 같아서 절대 외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남과 북 각자의 번영과 안전에 남북관계가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에 역시 외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때문에 남과 북의 정권과 통치자들은 남북관계에서 절대 눈을 뗄수 없는 운명을 안고 살고 있다. 서로 미워하고 증오하지만 외면하거나 관계를 끊을 수 없는 것이 남북의 관계기 때문에 정권과 통치자들도 그런 운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남북관계의 문제가 정권과 통치자들에게 지워진 숙명적 과제라는 점은 그동안 남북관계에 오히려 악재로 작용했다. 지난 60여 년 동안 남북관계는 점진적인 진전을 보이지 못했고 그것은 국민들에게 (북한은 잘 모르겠고) 큰 스트레스가 됐다. 남북의 정권과 통치자의 성향에 따라 좌우되는 정책이 가져오는 혼란과 영향은 고스란히 국민들이 껴안았지만 지금도 남북관계는 여전히 정권과 통치자가 전권을 행사하는 정치 현안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런 현상은 결국 남북관계와 관련된 문제에서 국민들을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고, 민주국가에서 지극히 비민주적인 상황을 만들어내고 있다.
평화연구의 시각에서 보면 국민을 소외시키는 남북관계 논의와 정책은 비민주적인 접근을 넘어 본질적으로 평화를 추구할 수 없는 접근이다. 남과 북 모두 한반도 평화를 얘기하지만 그 과정에서는 전혀 평화롭지 않은 과정과 방법을 택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현재 수준에서 정권과 통치자들이 얘기하는 평화는 아주 제한적인, 그러니까 무력 충돌의 부재 같은 '소극적 평화'를 얘기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평화는 한반도에서 남과 북의 공존이 성취되고 결국 통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그 과정은 전혀 평화적이지 않고 오히려 다수의 국민을 소외시키고, 현실적 필요를 외면하며, 때로는 어려움을 오히려 가중시키는 폭력적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물론 북한에게 평화적 과정을 주문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우리의 현실만 보기로 하자. 국민들은 때가 되면 바뀌는 정권의 입맛에 따라 변하는 대북 정책을 그저 지켜만 봐야 하고, 헤어진 가족과 상봉하는 일이 인도적 문제가 아닌 정치 현안이 되는 것 또한 두말 없이 받아들여야 하며, 갑자기 중단된 공단과 관광사업 때문에 경제적 손실을 봐도 그것 역시 재수가 없었다고 스스로를 달래야 한다. 이 모든 일은 남북관계와 대북정책이 정권과 통치자에게 훈장처럼 주어지는 숙명적 과제가 아니라 국민의 참여로 새로운 프레임이 만들어져야 하는 공동의 과제임을 말해준다.
평화연구는 궁극적인 평화를 성취해가는 과정과 방법에 더 관심을 쏟는다. 그것이 결과의 질을 결정하고, 결과의 질이 결국 사람의 삶의 질과 생존을 좌우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평화를 성취해가는 과정은 평화적이어야 하고 방법 또한 평화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평화적 과정과 방법의 핵심은 영향을 받는 모든 사람들의 '참여'다. 특정 개인이나 집단을 배제하고 참여를 보장하지 않는 것은 그 자체로 폭력적 과정이 될 수밖에 없지만, 더 나아가 그 결과물이 배제당한 사람에게는 폭력적 상황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평화는 본질적으로 사회 구성원 모두가 누리는 것이 돼야 하고, 그것은 참여를 통해 가장 잘 보장될 수 있다.
참여는 근본적으로 민주주의의 원칙과도 통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의 민주주의는 참여를 보장하지 않는 아주 희한한 구조를 가지고 있고 그것은 다수의 배제된 사람들에게 폭력적 구조가 되고 있다. 남북관계 및 대북정책과 관련해서는 사안의 중대성과 민감성이라는 핑계로 특히 국민의 배제가 마치 상식처럼 취급돼 왔다. 그러나 모든 국민들의 필요, 이익, 어려움, 불안 등이 수용되지 않는다면 정권과 통치자의 남북관계 구상과 대북정책은 본질적으로 '한반도 평화'라는 용어와도, 그 내용과도 부합할 수 없다. 평화적 과정과 방법을 거치지 않는 평화 담론과 노력이 모두가 원하는 평화 성취에 도움이 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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