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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사고, 아동 학살 수준평화갈등 이야기 /평화 2014. 4. 22. 00:00
결국 한 명도 살아 돌아오지 않고 있다. 세월호가 침몰된 이후 일주일이 지났지만 모두의 간절한 염원은 허공으로 흩어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악몽에 시달리고 매일 눈물을 달고 살며 우울증에 가까운 증세를 보이고 있다. 그렇지만 이제 눈물도 조금씩 말라가고 가슴은 답답하고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있다. 사고 직후 탈출자 외에는 한 명도 구조해내지 못했다는 사실이 너무 믿기지 않는다. 생존자 비율 36%, 선내 구조자 비율 0%. 이 기막힌 숫자는 우리가 그토록 외쳐대고 그래도 믿고 싶어한 '대한민국'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를 단적으로 설명해준다. 사실 깊이랄 것도 없다. 밑바닥이 바로 한치 발 밑이니 말이다. 이번 일로 대한민국의 밑바닥이 그대로 드러났다.
정부 및 관련 공공기관의 행정 체계와 생각의 깊이는 우리가 상상한 바로 그만큼이었다. 사안이 시급하고 중요한만큼 우리가 모르는 깊이가 있기를 기대했건만 독선적이고 오만한 태도는 생명이 꺼져가는 순간에도 변하지 않았다. 국가 차원의 재난인만큼 모든 사회 자원을 끌어 모으고 활용해 구조 계획을 세우고 실행해야 했지만 정부와 관련 기관은 여전히 자신들의 독점권을 유지하려 했다. 집단 지성의 시대에, 그리고 세계화 시대에 신속히 정보와 인력을 끌어모으고 도움을 요청하는 일을 전혀 하지 않았다. 도움을 주기 위해 가까이 대기하고 있던 어민들과 민간 잠수부들, 그리고 해양 전문가들의 얘기만 열심히 들었어도, 또한 개도 안 물어갈 자존심은 접어두고 비슷한 사고 경험이 있는 다른 국가들로부터 신속히 자문을 받고 실질적인 도움을 받았다면 한 명이라고 구해냈을 것이다.
정부와 기관들은 평소 버릇대로 자신들이 민간보다 우월하다는 오만한 생각으로, 그리고 어린 학생들이 죽어가고 있는 상황에서도 업무 권한을 잃지 않으려는 얄팍한 이기심으로 정보를 독점하고 통제권을 휘둘렀다. 자신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것만 가치있는 정보로 취급했고 자신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얘기하라고 강요했다. 오죽하면 침몰 직전 배에서 신고 전화를 한 학생에게 위도와 경도를 묻는 일을 했겠는가. 결국 바지선도, 오징어 배도, 고등어 배도 실종자 가족들의 항의와 여론의 비난에 밀려 하나씩 투입했다. 그것마저도 진정성보다는 비난을 피하려는 얄팍한 이기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밖에 이해할 수 없다. 무능하면서도 무능을 인정하지 않고, 긴급한 순간에도 조직 보호에만 열을 올리며, 국민에게 봉사해야 하는 자신들의 기본 임무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정부와 공공기관의 밑바닥이 이번에는 정말 제대로 드러났다.
청해진 해운과 세월호는 최악의 부패 스캔들이라 할만하다. 침몰 사고와 희생자 야기의 직접적 책임은 선장을 포함한 승무원들에게 있지만 그 뒤에는 눈 똑바로 뜨고 탐욕만 쫓는 비인간적이고 비열한 회사의 추잡한 모습이 있다. 그리고 그들의 탐욕은 떨어지는 콩고물로 배를 채우는 일에 맛들인 부패한 공무원들과 업자들의 협조 덕분에 실제상의 수익으로 바뀌었다. 세월호의 구입부터 증축, 안전 검사, 화물 적재, 운항, 신고, 실종자 구조 등 모든 단계에서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기업과 기관의 부패한 구조는 세월호를 침몰시키고 희생자를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최악의 조합으로 부패와 짝을 이룬 직업 윤리의 부재도 있었다. 세월호의 심각한 문제를 이미 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것을 신고하거나 언론에 제보도 하지 않고 수수방관한 세월호의 전.현직 승무원들은 회사의 탐욕을 유지하는데 기여했다. 부패가 대한민국의 불치병으로 등극한 것은 이미 오래된 일이지만 직업 윤리의 부재도 불치병 수준인 것을 부인하기는 힘들다. 그 많은 승객들의 죽음을 야기했으면서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승무원들, 자신은 위험해서 세월호를 타지 않았다고 말하는 전 승무원들, 원래 화물을 제대로 묶지 않는다고 말하는 적재 담당자들, 화물을 초과 적재하는 것이 흔하다고 태연히 말하는 사람들, 그들 누구에게서도 직업 윤리라는 것은 도대체 찾아볼 수가 없다. 그들의 직업 윤리의 깊이는 한 뼘도 되지 않았다.
정부와 공공기관의 오만과 독선, 기업과 개인의 부패와 직업 윤리 부재는 결국 어린 학생들의 희생, 아니 '학살' 수준의 일로 이어졌다. 사실 '어린 학생'이라고 말하는 것은 참 막연하고 그 언어는 대한민국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일을 저질렀는지 제대로 설명하지 않는다. 어찌보면 언어가 참혹한 사건을 희석시키는 것 같기도 하다. 승객의 68%를 차지했던 학생들은 법적으로는 '아동'이었다. 법마다 아동을 규정하는 것이 좀 다르기는 하지만 대한민국의 아동복지법은 18세 미만을 아동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아동 복지'란 "아동이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기본적인 여건을 조성하고 조화롭게 성장, 발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경제적, 사회적, 정서적 지원을 말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겉으로 다 큰 것 같은 그 학생들은 사실은 17세도 되지 않아 주민등록증 지문 기록조차 찾을 수 없는 아이들이다. 그 아이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우선적으로 보호받아야 하고 법으로까지 지원을 강조하고 있는 아동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복지는 그만두고 가장 기본적인 생존조차 보장해주지 못했다. 한 사고에서 전체의 23%만 살아 남고 77%인 250명의 아동이 사망하거나 실종됐다는 것은 거의 학살 수준의 일이다. 사고를 막을 수 있었고 구조도 할 수 있었는데 구조적, 사회적, 개인적 무책임과 고의적 외면 때문에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감히 이런 표현을 할 수 있다.
세월호 학생들의 죽음 하나 하나는 어른의 그것과 다르게 취급돼야 한다. 똑 같이 하나의 숫자로 표시되지만 분명 다른 해석이 이뤄지고 그에 따른 실행이 뒤따라야 한다. 대한민국이 그렇게 강조하는 아동 권리와 아동 보호가 그 학생들에게도 분명히 적용됐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월호 사고를 만든데 직접, 간접적으로 연결된 모든 기관, 기업, 개인에게는 그러므로 가중 처벌이 내려져야 한다. 초기에 구조 작업을 제대로 진행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결국 그 어린 목숨들을 모두 잃게 만든 오만하고 독선적인 정부와 공공기관도 그에 대한 책임을 두 배, 세 배로 져야 한다. 세월호 사고로 밑바닥을 드러낸 대한민국이 만든 지금의 현실은 비인도적인, 그것도 수백 명의 아동을 희생시킨 어떤 핑계도 적용될 수 없는 가장 비인도적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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