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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파의 교회, 한국의 교회평화갈등 이야기 /평화 2014. 4. 30. 00:00
세월호 사고가 어디까지 닿아있는지는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뿌리를 파헤칠수록 연결된 다른 뿌리를 발견하게 되는 형국이다. 그중 가장 충격적인 것이 세월호 운영사인 청해진 해운, 그리고 유병언라는 속을 알 수 없는 희대의 사기꾼 및 그 가족, 그리고 '구원파'라고 불리는 교회의 밀접한 관계다. 물론 여기서는 돈이 오가는 사업상의 관계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세월호 사고의 근본원인 중 하나는 분명 구원파라는 교회의 비정상적인 신앙 생활과 그것을 이용한 유병언라는 실권자의 악행이다. 온갖 방법으로 법망을 피하고 상상을 초월하는 거짓과 착취로 재산을 축적한 그의 악행에 토대를 제공해준 것이 '교회'라는 점은 기독교인의 한 사람으로 특별히 경악스럽고 관심이 가는 대목이다. 이런 소름 끼치는 사실은 한국의 교회에게 심각한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구원파 교회는 한국의 주류 교회에 의해 이미 이단으로 분류돼 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일반 교회와 이단 교회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일까? 이것이 내 주요 질문이다. 구원파 교회는 세상과 멀리 떨어져 은밀한 지역에 그들만의 공동체를 만든 것도 아니고 신도들이 일상생활을 모두 팽개친 것도 아니다. 물론 과거 그런 생활을 한 적이 있다는 증언도 나왔지만 구원파 교회는 버젓이 도시 한가운데서 집회를 하고 일반 사람들을 상대로 온갖 사업도 한다. 그렇다면 그렇게 많은 교회가 있고 정상적인 기독교 신자들이 그렇게 많은데 왜 구원파 신도들은 이단 교회를 구분하지 못한 것일까? 그것은 그들이 구원파 교회와 일반 교회 사이의 별 차이를 발견하지 못해서인 것은 아닐까? 이 위험하고도 심각한 질문에 자꾸 집중하게 되는 것은 왜일까?
사실 한국에는 끊임없이 기독교를 내걸은 이단 종교 집단들이 등장했었다. 지금도 교회들은 갈수록 세를 확장하고 있는 '신천지'라는 이단 집단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그런데 특별히 구원파 교회의 특징은 교회와 사업을 교묘히 연결시켰다는 것이고 신자들이 그것에 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것은 한국의 교회가 구원파의 교회처럼 직접 돈벌이에 발을 들여놓지는 않아도 돈을 좋아한다는 것과 통하는 것이 아닐까? 많은 교회들이 교회를 다니면 '축복'을 받는다고 강조하고 그 '축복'은 결국 돈을 많이 버는 것이라고 버젓이 얘기한다. 그런 신자들에게 신앙생활은 결국 돈을 벌기 위한 '투자'가 된다. 실제 사업을 잘 하기 위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도 많으니 완전히 왜곡된 표현도 아니다. 교회는 자체 유지를 위해서도 많은 돈을 필요로 하는데 그 경비는 모두 헌금으로 충당된다. 그러니 헌금을 많이 내는 신자들을 필요로 하고 무슨 짓을 해서 돈을 벌든 헌금을 많이 내면 교회에서는 대우를 받는다. 한 마디로 교회는 돈과 너무 가깝고 너무 가까운 나머지 신앙생활의 주목적이 헌금을 많이 내 교회를 잘 운영하는 것으로 착각될 정도다. 많은 교회들이 휘황찬란한 교회를 짓는 것을 신앙공동체의 목표로 삼고 건축 헌금을 무더기로 걷는 것을 봐도 그렇다. 돈과 가까운 교회의 이런 현실이 사람들로 하여금 이단을 구분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이단 교회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가 재산까지 탕진할 정도로 지나친 헌금을 강요하는 것인데 노골적으로 헌금을 강조하는 것에 대해서는 일반 교회와 다를 바가 없으니 사람들이 별 차이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돈과 지나치게 가까운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경제 윤리가 없다는 것이다. 거창하게 경제 정의까지 얘기하고 싶지도 않다. 다만 기독교 윤리를 거스르지 않는 수준에서 어떻게 돈을 벌어야 하고 어떻게 돈을 써야 하는지 교회에서 가르치지 않는 것은 문제라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의 이중적 태도에 기인한다. 교회 운영을 위해, 그리고 많은 신자들을 모으기 위해 돈을 강조하면서도 교회는 세속적인 경제 문제와는 상관없는 것처럼 행세한다. 때문에 세속 생활과 관련된 경제 윤리는 교회와 상관없는 것으로 취급한다. 그런데 신자들은 교회 밖에서 돈을 벌고 그것으로 헌금을 하니 교회가 경제 윤리와 관계가 없을 수가 없다. 적어도 부당하게 누군가의 땀과 피를 착취한 더러운 돈이 교회로 들어오는 것은 막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교회 안에는 버젓이 더러운 돈이 들어오고 그 돈은 한 번의 기도로 정화된다. 더러운 돈을 가져온 사람도 헌금을 통해 면죄부를 받는다. 중세시대도 아닌데 참 기가 찰 일이다. 어쨌든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교회의 이런 경제 윤리 외면 때문에 사람들이 구원파 교회와 같은 이단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구원파 교회가 온갖 부당하고 추잡한 방법으로 사업에 손을 대고, 사람들을 착취하며, 다른 사람들의 목숨을 위협하면서까지 돈을 벌어도 그것이 기독교 윤리에 어긋나기 때문에 비정상이라는 생각을 못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면 할수록 소금이 끼친다.
한 가지 더 얘기하자면 교회의 지나친 가부장적 문화다. 한국의 교회는 지나치게 목회자 중심이고 지나치게 평신도를 배제시키는 구조다. 거의 모든 교단과 많은 교회가 목회자 중심의 의사결정 구조를 가지고 있고 평신도의 참여는 극히 제한돼 있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이런 구조에 길들여져 있다. 그런데 이단 교회는 자신을 신, 또는 신에 버금가는 존재로 얘기하는 교주에 절대 복종하도록 요구한다. 설사 일반 교회를 다니다 이단 교회에 들어갔다 해도 그 점에 있어서는 별 차이를 느끼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한 문화학자도 유교적 가부장 문화를 이단을 만들고 확장시키는데 기여하는 한 요인으로 지적했다. 그런데 교회는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에 다른 어떤 사회 조직보다도 가부장적 문화를 강조하고 그것을 여전히 효율적인 조직 운영의 방식으로 여기고 있는 곳이다. 때문에 사회가 발전해도 가부장 문화의 폐단을 화석처럼 보관하고 있을 마지막 공간이 교회가 될 것 같은 찜찜한 상상까지 하게 된다. 이런 변하지 않는 교회의 가부장 문화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교주나 실권자의 독재적이고 비윤리적인 행태가 노골적으로 드러남에도 이단 교회를 잘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물론 교회가 세월호 사고에 어떤 책임이 있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렇지만 우월한 도덕성을 중요한 가치의 하나로 삼아야 하는 교회라면 이번 사고와 관련해 대두된 구원파 교회의 문제를 조금 다르게 봐야하지 않을까? 사람들이 쉽게 이단 교회를 구분할 수 없도록 만든 한국의 교회가 특별히 생각해야 할 것은 단순히 이단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가 사회에서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의 문제가 아닐까? 그동안 교회 안에서는 교회의 사회 참여와 그에 반대하는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 왔다. 그런데 이제 그런 대립은 사치스런 일이 됐다. 당장 교회가 고민할 것은 '어떻게 하면 사회에 해를 끼치지 않을까'이다. 돈과 가까운 교회, 경제 윤리를 외면하는 교회, 그리고 민주사회에서 비민주적인 가부장적 문화를 강조하는 교회가 결국 사회에 어떤 악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를 성찰할 때다. 교회가 종교 조직으로써 도덕적 우위를 가지고 사회가 바른 방향으로 가도록 선도하기는커녕 사회와 아무런 차별성조차 갖지 못하거나 어떤 면에서는 뒤떨어지는 현실을 직시할 때다. 교회에서 잘못 배우고 잘못 길들여진 기독교인들이 사회로 나가 어떤 못된 짓을 하고 사는지, 그들로 인해 사회가 어떻게 병들어가고 있는지 전혀 감시하지 않는 교회의 현실을 고민할 때다. 무엇보다 세월호 사고와 그 뿌리인 구원파 교회의 문제를 보면서 한국의 교회가 누구나 쉽게 구별할 수 있을 정도로 이단 교회와 선명한 차별성을 가지지 못했다는 점은 정말 한탄스런 일이다. 그래서 감히 주장하건데 한국의 교회는 이제 사회에 '해 끼치지 않는 교회'가 되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소심하고 패배자적인 생각일 수 있지만 그 정도만 해도 교회는 사회로부터 돌팔매는 맞지 않을 것 같다. 나아가 이번 사고와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는데 조금이나마 기여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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