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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마을, 공동체 회복은?평화갈등 이야기 /갈등해결 2014. 3. 22. 00:00
지난 한 해 동안 제주 해군기지 건설을 둘러싼 갈등은 다른 사회 현안에 밀려서인지 뉴스에서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었다. 뉴스에 나오지 않아도 문제는 여전히 진행중이었고 관계된 많은 사람들은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요즘 제주 해군기지 건설 갈등과 강정마을의 힘든 시간에 대한 뉴스가 종종 다시 얼굴을 내밀고 있다. 이제 갈등은 지방선거 관련 뉴스로 진화했다. 해군기지 건설 갈등은 지방선거 출마자들에게는 절대 외면할 수 없는 문제기에 예비후보들은 각자 나름대로의 문제 접근 방식을 주장하고 있다. 비록 바람직한 상황은 아니지만 그런 식으로라도 문제가 다시 뉴스에서 언급되는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무엇보다 언론이 강정마을 사람들이 지난 8년 동안 겪어온 힘든 시간들을 한 줄이라도 언급하게 된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제주 해군기지 건설 갈등과 강정마을이 직면한 문제는 한 사회가 갈등에 적극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으로 대응하지 못했을 때 야기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보여준다. 이런 상황은 정부와 사회에 여러 가지 면에서 큰 손실을 가져오지만 무엇보다 가장 심각한 것은 문제의 중심에 선 공동체가 겪는 고통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는 공동체 사람들 사이의 관계 파괴와 그에 따른 전체 공동체의 파괴다. 관계와 공동체의 파괴는 회복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아주 어렵기 때문에 어느 사회에서건 갈등이 야기하는 가장 큰 문제라 할 수 있다. 갈등 현안이 해결된다해도 관계와 공동체 회복 문제는 저절로 해결되지 않는다. 때문에 별도의 과정과 노력을 필요로 한다. 물론 공동체 구성원들의 노력이 핵심이 돼야 하겠지만 이미 관계가 단절되고 상호 불신이 높은 사람들은 그런 노력을 스스로 시작하기 힘들다. 외부인이나 단체가 지원하는 노력에도 선뜻 응하지 않을뿐만 아니라 신뢰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관계와 공동체 회복은 지난한 과정이 되고 아무리 섬세한 계획과 절차를 준비해도 공동체 구성원들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한 작동하지 않는다.
제주해군기지 갈등은 지금도 진행중이고 강정마을도 여전히 정부에 문제 해결을 주문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등이 끝난 후에나 다룰 일인 것 같은 공동체 회복을 지금 얘기해야 하는 이유는 문제 해결과 상관없이 그것이 강정마을에게는 가장 중요한 문제일 것이기 때문이다. 해군기지 건설을 둘러싼 갈등이 8년 째로 접어들고 있지만 아직 문제 해결의 실마리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뜬금없이 공동체 회복을 얘기하는 것이 뭣 모르고 주제 넘는, 또는 지나치게 이상적인 접근이라고 비난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사실 공동체 회복의 문제는 갈등이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염두에 뒀어야 하는 문제다. 적어도 갈등 후 공동체 회복을 염두에 뒀다면 처음부터 관계를 조금 덜 파괴하는 방식으로 갈등이 전개됐거나 적어도 강정마을이라는 공동체가 갈등이 정리된 후에도 오랜 시간 동안 겪어야 할 힘든 시간에 대한 진지한 사회적 성찰이 이뤄졌을 것이다. 무슨 부질없는 후회냐고 말할 수 있다. 또는 갈등이 아직 진행중인데 무슨 한가한 소리냐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해군기지 건설 여부에 상관없이 강정마을은 앞으로도 그곳에 있을 것이고, 거기 사는 사람들도 계속 함께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공동체 회복은 불가피한 삶의 문제가 될 것이고 그런 문제를 시기를 따져 고민할 수는 없다. 그것은 오히려 8년 전부터 꾸준히 고민했어야 하는 문제다. 오히려 지금은 너무 지체된 때다.
갈등은 지구촌 곳곳에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곳 사람들도 모두 비슷한 갈등을 겪고 관계와 공동체 파괴를 경험하곤 한다. 전쟁이 끝난 사회에서도, 학살이 끝난 땅에서도, 개발 갈등이 지난 마을에서도 사람들 사이의 관계와 그들이 사는 공동체를 원래 모습으로 회복하는 것은 최대의 도전이 되곤 한다. 관계와 공동체 회복은 정치인들나 갈등 당사자들의 조약이나 합의, 해결책 서명, 구두 약속 같은 것으로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조약, 합의, 서명, 구두 약속 같은 것은 공동체 회복을 위한 단초를 제공해줄 뿐이다. 그 다음 단계는 오롯이 공동체에 사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삶의 숙제가 된다.
관계와 공동체 회복을 위해서는 화해가 선행돼야 한다. 물론 원수처럼 지내던 사람들이 하루 아침에 화해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당면한 삶의 문제 때문에 조건부로 또는 아주 좁은 틀 안에서 형식적 화해를 시도하기도 한다. 비록 그것에 진심이 많이 담기지 않았더라도 화해의 시도 또는 한정적 화해는 진정한 화해와 공동체 회복을 위해 함께 노력할 최소한의 명분을 제공해주는 역할을 한다. 때문에 형식적인 화해라도 안하는 것보다는 백 배, 천 배 낫다.
공동체 회복에 대해 강의할 때 내가 참고하는 화해의 틀은 대단한 이론가이자 세계 곳곳의 갈등 현장을 누비는 실천가이기도 한 존 폴 레더라크(John Paul Lederach)가 <화해를 향한 여정>이라는 책에서 제시한 것이다. 그는 세계 곳곳에서 전쟁과 갈등이 끝난 후 사람들이 삶을 지속시키기 위해 선택한 화해의 방식을 세 가지로 분류했다.
첫째는, 과거 -> 현재 -> 미래의 방식이다. 이것은 가장 이상적인 접근 방식이라 할 수 있다. 과거의 잘못을 밝히고, 현재에서 그에 대한 책임을 지게하며, 공동의 미래를 설계하는 방식이다. 과거의 규명은 진상조사 형식을 통해 이뤄지고, 현재의 책임 지우기는 사법적, 사회적 판단에 따라 이뤄진다. 이 방식은 현재의 삶을 살기 위해, 그리고 미래로 함께 나아가기 위해 과거에 일어난 일을 먼저 밝혀야 한다는 생각에 기초한 방식이다.
둘째는, 현재 -> 미래 -> 과거의 방식이다. 이것은 과거 어느 편에 섰든 상관없이 갈등 후 현재 공동으로 직면한 생존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때문에 현재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상호의존을 인정하고, 그후 자신과 후손을 위해 미래로 나아가는 방식을 취한다. 이 경우 과거는 공동체나 사회가 준비가 될 때까지 잠시 유보된다. 과거의 경험이 너무 고통스럽고, 혼란스러우며, 상처가 많기 때문에 그것을 직면하는데 많은 용기, 시간, 에너지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미래 -> 현재 -> 과거의 방식이다. 이것은 생존을 위해서긴 하지만 원수였던 사람들과 현재를 같이 살아간다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워 현재보다는 자신과 후손들의 미래의 삶에 초점을 맞추는 방식이다. 미래에 초점을 맞추면 원수와 마주하고 한 마을에서 살아야 하는 현재를 감당하기가 쉬워지기 때문이다. 그런 후 과거와 마주할 준비가 될 때까지 인내하며 기다린다. 이것은 '킬링 필드'라는 학살을 경험한 캄보디아 사람들이 선택한 방식이다. 그들은 아직도 과거를 정면으로 마주할 준비를 하지 못한 상태다.
이런 화해의 방식은 세계 곳곳에서 험한 갈등과 공동체 파괴를 겪은 사람들이 삶을 지속시키기 위해,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공동체의 삶을 회복시키기 위해 선택한 방식들이다. 강정마을도 공동체 회복을 위해 이중 비슷한 한 가지 방식을 선택할지 고민할 수 있다면 오히려 가장 다행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그딴 이론이 무슨 소용이냐고, 그리고 다른 나라 사람들의 선택이 우리의 상황에 적용될 수 있지 않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잇다. 물론 타당한 지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민을 하는 것이 안하는 것보다는 낫고, 고민을 하면 할수록 나은 방법을 찾게될 가능성은 높아진다. 무엇보다 피할 수 없고 꼭 다뤄야 하는 문제라면 지금부터라도 적극적으로 고민을 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제주해군기지 건설 갈등과 강정마을의 피해는 한국사회 전체가 만든 문제다. 그러므로 관계와 공동체 회복은 비록 강정마을 사람들이 다뤄야할 문제지만 한국사회 전체와 무관하지 않다. 물론 공동체 회복 자체가 필요한지는 강정마을 사람들이 판단할 문제고 그외 사람들은 그들의 결정을 존중해야 한다. 그렇지만 강정마을 사람들이 공동체 회복을 필요로 하고 그 절차와 노력에 있어 어떤 요구나 도움을 요청한다면 한국사회 전체가 그것에 응답해야 한다. 또한 그들과 함께 적극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누가 뭐래도 강정마을 공동체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해군기지 건설 갈등과 관련해 억울하게 가장 많은 피해를 보고 있는 희생자이기 때문이고 우리사회 전체가 그들의 희생에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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