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스빌딩과 한반도 평화 1 전쟁 후 피스빌딩평화갈등 이야기 /한반도평화 & 평화통일 2018. 1. 24. 10:34
피스빌딩의 적용 가능성
피스빌딩(peacebuilding) 개념은 1992년 <평화 의제/An Agenda for Peace>라는 유엔 보고서를 통해 처음 소개됐다.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그렇다. 기존의 유엔 활동은 국가 및 집단 사이 무장 충돌이나 전쟁을 종식시키는 피스메이킹(peacemaking)과 휴전협정이나 평화조약 준수를 감시하는 피스키핑(peacekeeping)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러나 이런 소극적인 접근은 사회 집단 사이의 갈등을 예방하고 무장 충돌의 재발을 막는 데 충분하지 않았다. 유엔은 전쟁 후 전반적인 국가 및 사회의 재건, 사회 제도의 수립과 사회 구성원들의 역량 형성, 나아가 집단 및 개인 사이 관계의 회복과 그에 대한 지원이 동반돼야 전쟁 및 무장 충돌을 예방하고 평화를 정착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고 접근을 바꾸기로 했다. 이것이 바로 피스빌딩 개념이다. 이때 유엔이 얘기한 피스빌딩은 전쟁이나 무장갈등을 겪은 사회의 재건에 맞춰진 것이었다. 그러나 20년 이상이 지난 현재 피스빌딩은 국제기구부터 풀뿌리 단체까지, 그리고 무장갈등에 취약한 사회에서부터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사회의 변화에까지 광범위하게 적용되고 있는 개념이자 접근 방식이 됐다. 폭력의 감소, 중단, 제거, 그리고 갈등의 평화적 해결, 평화의 정착 및 지속가능한 평화의 성취 등과 관련된 대부분의 사업과 프로그램이 '피스빌딩' 개념 및 접근에 기초해 이뤄지고 있다.
그렇다면 피스빌딩 개념과 접근을 한반도 평화에도 적용시킬 수 있을까? 물론이다. 한국사회에서는 여전히 피스빌딩이 생소한 용어지만 피스빌딩 접근을 통해 한반도 평화 문제를 성찰하면서 과거를 평가하고 미래의 비전을 만드는 시도는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여전히 전쟁의 가능성을 완전히 해소하지 못하고 오히려 실질적이든 수사적이든 전쟁의 위협에 저당잡혀 있는 우리의 현실을 새로운 개념을 통해 성찰해 보는 것은 한국사회와 한반도 상황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일이 될 것이다. 새로운 성찰과 접근은 새로운 시도와 변화를 가능하게 할 수 있다.
한국전쟁 후 피스빌딩
한국전쟁은 종전을 위한 평화조약이 아닌 휴전협정으로 중단됐다. 그것도 남과 북이 아니라 북한.중국.유엔이 조인한 협정이었다. 그후 남북의 무장 충돌 방지와 휴전협정 준수를 통한 '한반도 평화'는 유엔의 감시 하에 놓이게 됐다. 지금의 유엔 평화유지활동과 같은 맥락이다. 비무장지대로 분리된 남과 북은 큰 군사적 충돌 없이 지금까지 지내고 있으니 유엔의 평화유지활동은 성공한 셈이다. 그렇지만 매우 유감스럽게도 그것 뿐이었다. 전후 사회 재건은 최소한의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 이외에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남한은 미국의 전리품이 돼 버렸다. 피스빌딩 개념을 적용해 분석할만한 사회 및 공동체 재건 노력은 이뤄지지 않았다. 물론 당시에는 국제사회에 피스빌딩 개념이나 접근이 없었으니 우리가 운이 없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후 거의 65년이 지난 지금까지 처음의 잘못된 접근과 간과한 것들을 제대로 성찰도 시도도 하지 않고 있는 현재의 상황은 우리가 짊어져야 할 책임이다.
피스빌딩 개념과 접근을 통해 볼 때 전후 우리가 저지른 실수는 사회와 공동체의 회복과 변화, 그리고 집단 및 개인의 관계 회복과 변화에 관심을 두지 않고 증오와 분노에만 집중했다는 것이다. 적이었던 북한에 대한 증오와 분노는 당장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하더라도 남한 내에서 서로 적이 되었던, 그리고 전쟁 후 이념 대결에 의해 새롭게 적이 된 집단 및 개인 사이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다루고 그들의 관계를 회복시키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그 결과 남한 내 이념과 견해가 다른 집단 및 개인 사이의 상호 증오와 대립은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고 이제 '남남갈등'이란 말로 간략하게 표현되고 있다. 가장 큰 실수는 전쟁 재발을 막고 평화를 정착시키겠다는 사회적 목표를 설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 목표가 설정됐다면 당연히 북한과의 관계를 어떻게 점진적으로 개선하고 공존할 것인지에 대한 성찰, 고민, 계획 등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목적 자체가 설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사회는 북한과의 전쟁 재개를 염두에 두고 군비 경쟁과 대립에 몰두해왔고 국민들은 그것을 지지해왔다. 물론 기본적으로 휴전협정이 그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해준 것이지만 수십 년의 세월을 거치면서도 우리는 그 굴레에서 빠져나오려는 적극적 시도를 하지 않았다.
피스빌딩을 적용해 성찰할 때 가장 유감스러운 부분은 우리사회가 여전히 전쟁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전쟁 가능성 없는 평화 정착과 지속가능한 평화를 궁극적 목표로 설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휴전협정 후 거의 65년이 지난 지금까지 계속 군사적 긴장, 군비 경쟁, 군사적 대결 등 비슷한 상황을 반복하고 있다. 참혹한 전쟁을 겪은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피스빌딩 개념에서 전쟁을 겪은 사회(post-conflict society)의 재건과 회복을 위해 가장 먼저 그리고 기본적으로 설정되는 목표는 전쟁과 무력 충돌을 반복하지 않는 것이고, 그 목표에 맞춰 국가 및 사회 재건의 구체적 계획과 실행이 이뤄지는 것에 비춰볼 때 우리의 현실은 무척 개탄스럽다.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남북 사이에 회담과 교류가 이어지고 있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일이다. 그러나 한국사회 구성원 모두가 이 역사적인 일을 환영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이견은 대부분 정치적, 이념적 입장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긴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우리사회에 전쟁 가능성 없는 평화 정착과 지속가능한 평화 성취에 대한 합의된 목표가 없기 때문이다. 남과 북이 관계를 복원하고 대화와 교류를 재개하면 분명 전쟁 가능성이 획기적으로 낮아질 것이지만 한국사회 구성원 중 일부는 전쟁 없는 한반도를 상상하지도 지지하지도 않는다. 그것이 비록 전쟁에 대한 구체적 성찰이 없는 허구적 상상력에 기반하고 있을지라도 말이다. 이것은 우리사회가 가진 치명적인 결함이고 남북 문제와 한반도 평화 접근에 있어서 지속적으로 내부적 저항과 대립을 만들어내는 원동력이 된다. 이런 근본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면 이 땅의 평화는 영원히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 피스빌딩은 '평화세우기'로 번역돼 사용되기도 한다. 한국사회에서 아직 이 용어가 자리잡지 않았기 때문에 영어 용어 그대로 한글로 표기하기로 한다.'평화갈등 이야기 > 한반도평화 & 평화통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피스빌딩과 한반도평화 3 한국전쟁, 선택된 트라우마 (0) 2018.03.23 피스빌딩과 한반도 평화 2 아래로부터의 평화 (0) 2018.02.13 트럼프, 북한엔 인권 공격 남한엔 평화 판매 (0) 2017.11.08 평화, 그 어려움에 대하여 (0) 2017.10.14 언론, 전쟁에도 냉정할 것인가 (0) 2017.0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