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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빌딩과 한반도 평화 2 아래로부터의 평화평화갈등 이야기 /한반도평화 & 평화통일 2018. 2. 13. 15:17
이벤트는 끝났다
'번갯물에 콩 볶아 먹는다'는 옛말이 생각났다. 1월 1일부터 한 달여 동안 숨가쁜 일정이 계속됐다.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이 신년사에서 평창동계올림픽 참가를 시사하고, 하루 뒤 우리 통일부 장관이 고위급회담을 제안했다. 그후 일사천리로 남북 고위급회담, 북한예술단 파견, 남북 여자아이스하키팀 구성 등이 결정됐다. 2월 8일 북한예술단의 강릉 공연을 시작으로 올림픽 개회식 남북선수단 공동 입장과 성화 점화, 북한대표단 방문, 북한예술단 서울공연 등 논의의 결과물인 이벤트가 줄을 이었다. 그중 하이라이트는 북한 특사 김여정의 등장이었다. 중간 중간 예정에 없던 일도 생겼지만 모두 원만하게 해결됐다. 남과 북의 관계개선 의지가 강했기 때문이다. 11일엔 김여정 특사와 김영남 상임위원장이 돌아갔고 12일엔 북한 예술단도 돌아갔다. 이벤트는 끝났다. 하나가 남긴 했다. 남북 여자아이스하키팀 경기와 북한응원단이다.
모든 이벤트는 성공했다. 극우 성향의 극소수 사람들을 제외하곤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이뤄진 남북회담, 선수단 공동입장, 예술단 방문 등을 모두 환영했다. 10년 이상 남북관계가 꽁꽁 얼어붙은 후 일어난 일이라 신기하기도 감격스럽기도 했다. 특히 김정은 위원장이 특사로 보낸 김여정과 그녀가 들고 온 친서와 메시지는 향후 남북관계 복원과 핵협상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솔직히 한 달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정신없이 긴박하게 돌아간 남북 회담 및 교류를 보면서 다른 한편으로 당황스러웠다. 이번의 모든 일은 남북 정상의 결단으로 이뤄진 것이었고 그 전까지 우리는 최고조에 달한 한반도의 정치적, 군사적 긴장으로 거의 절망의 나락에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뉴스 프로그램에 나온 한 시사평론가의 말이 이런 상황을 잘 설명해줬다. '지도자가 결정을 하면 이렇게 일이 빨리 진행될 수 있다'고 말이다. 맞는 말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일이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하면 씁쓸한 일이다. 독재국가인 북한에서야 그렇다쳐도 민주주의 국가인 남한에서도 지금까지 비슷한 일이 반복돼 왔기 때문이다.
하향식에서 상향식으로
지금까지의 남북관계는 기복이 심해도 너무 심했다. 지난 20년을 돌아보면 더욱 그렇다. 국민의정부와 참여정부에서 이뤄졌던 정상회담과 남북관계 개선은 그후 정권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이전의 관계는 모두 무너졌고 그에 더해 꽁꽁 얼어붙었다. 정부의 일방적 결정에 대중이 끼어들 여지는 전혀 없었고, 남북관계 개선과 평화적 공존을 원하는 대중의 기대와 요구는 깡그리 무시당했다. 그리고 이어진 북한의 핵개발 가속화로 한반도는 최악의 긴장 상태로 빠져들었고 상호 압박, 무력 시위, 그리고 말 공격이 계속됐다. 이것 또한 많은 사람들의 기대와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이런 한반도 상황을 피스빌딩과 연결시켜 해석하면 원칙적으로 평화를 위한 접근으로 보기 힘들다. 피스빌딩의 핵심 개념 중 하나는 아래로부터의 접근, 다시 말해 상향식(bottom-up) 접근이다. 이것은 이상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현실적인 것이다. 피스빌딩 이론은 현장 적용과 성찰을 통해 발전해왔고, 그것을 통해 증명되고 정리된 것이 바로 상향식 접근이다. 평화는 결정권을 가진 몇 사람, 또는 특정 집단의 의지와 행동으로 가능하지 않고 공동체와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함께 의견을 모으고 행동해야 가능하다는 것이 크고작은 성공과 실패의 사례들을 통해 증명됐다. 그러므로 상향식 접근은 이상적이고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가장 평화가 필요한 곳에서 불가피하고 실질적인 접근인 셈이다. 그런데 그동안 한반도 평화와 관련된 우리사회의 접근은 철저하게 위로부터의 접근, 다시 말해 하향식(top-down) 접근이었다. 결정권자, 특히 대통령이 자신의 이념과 의지에 따라 정책과 실행 원칙을 만들고 그것을 밀어붙이는 것이었다. 국민의정부와 참여정부도 근본적으로 다를 것이 없었다. 대중과의 교감과 소통에 매우 소홀하고 미흡했다. 때문에 '남남갈등'이란 신조어가 생겼고 그것이 해를 거듭할수록 강화돼 지금의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렇다면 피스빌딩을 한반도 평화에 적용한다면, 다시 말해 상향식 접근을 적용한다면 어떤 식이 될 수 있을까? 그런데 이것을 논하기 전에 전제돼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상향식 접근이 우리의 상황에서 필요한가?'이다. 남북문제는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데 거기에 대중이 끼어드는 것을 현실적이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은 방식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최근의 남북 여자아이스하키팀 구성 과정을 보자. 모든 사람들이 지켜봤듯이 아주 갑자기 정부 주도의 일방적 방식으로 이뤄졌다. 당사자인 선수들과 충분한 소통도 없었다. 정부는 사안의 중대성과 절박한 상황을 내세워 불가피한 일이었다고 항변하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원칙적으로 따져보면 그것은 기존의 모든 정부가 해온 하향식 접근과 전혀 다르지 않았고 많은 시민들이 그런 방식에 문제를 제기했다. 물론 그렇다고 그들이 남북관계 개선이나 한반도 평화를 원치 않거나 단일팀 자체에 부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다만 시민들은 일방적 하향식 접근과 결정의 부과를 지지하지 않았던 것이다. 설사 그것이 남북관계와 한반도 평화에 기여할 수 있더라도 말이다. 이것이 우리가 직면한 현실이다. 그러니 적어도 이제는 모든 사람이 하향식 접근을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여기는 상황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점은 그런 방식으로는 지속가능한 한반도 평화를 성취하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현재의 하향식 접근을 축소시키고 대중의 견해를 수렴하고 점차 참여를 높이는 상향식 접근이 가능할까? 여기에는 두 방향에서의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하나는 그동안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여겼던 하향식 접근에 사회 모든 층위의 요구와 필요를 적극적으로 결합시켜 일방적 하향식을 점진적으로 개선하는 노력이다. 다른 하나는 결정권자들의 하향식 접근에 대한 대중의 적극적이고 비판적인 의사 표명과 행동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압박, 감시, 참여 요구, 독려, 격려 등 다양한 방식이 필요하다. 한반도 평화와 관련해 지금까지 이 두 방향의 노력이 모두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때문에 남북관계가 지속적인 발전을 유지하지 못하고 원점으로 복귀하는 일이 반복됐던 것이다. 특별히 지금의 변화된 상황에서조차 상향식 접근을 확대하기 위한 노력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현 정부에서 남북관계가 어느 정도 개선된다 해도 정권이 바뀌면 다시 원점으로 복귀하는 악몽이 재현될 수도 있다.
이벤트가 끝나고 잠깐 햇빛이 스치고 간 지금 가장 우려되는 것은 동계올림픽 후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이다. 사실 더 우려되는 것은 당장 상향식 접근이 확대되지 않을 것이고 그 결과 여전히 하향식 접근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계속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대중은 안갯 속에서 계속 살얼음판을 걷는 상황을 반복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런 현실적 도전에 직면해 우리 모두는 한 달 조금 넘는 시간 동안 남과 북이 서로의 얼굴을 보고 어울리면서 느꼈던 행복함과 안전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여전히 하향식 접근에 머물러 있는 정부는 물론 그런 정부를 비판해야 하는 시민들도 이 점을 반드시 기억해내야 한다. 그래야 적어도 지금의 따뜻함을 하나의 이벤트가 아니라 평화 정착을 위한 새로운 계기로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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