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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합의, 정치적 용서와 화해평화갈등 이야기 /평화 2015. 12. 29. 11:56
정치적 합의, 정치적 화해
한국과 일본이 위안부 문제에 합의했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그런데 합의 결과보다 제대로 된 합의였느냐에 더 관심이 집중됐고 평가는 이미 내려진 것 같다. 정부는 성공한 합의라고 자화자찬하고 있지만 국민들, 특별히 당사자들은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넘어 분노하고 있다. 이런 일이 생긴 이유는 간단하다. 당사자, 그러니까 희생자의 요구가 반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른 말로 정치적 합의일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다.
정치적 합의라 해서 반드시 나쁠 것은 없다. 당사자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그들의 요구를 적극 수렴해 외교적 협상을 진행한다면 말이다. 문제는 이번 합의에서 그것이 빠져 있고 오직 관심은 양국의 정치적 화해에만 맞춰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목적을 위해 걸림돌이 되고 있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정치를 합의를 이룬 것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대통령이 말한 "시간적 시급성과 현실적 여건 하에서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이뤄낸 결과"라는 대목과 "대승적 견지에서 ...피해자 분들과 국민 여러분들께서도 이해해 주시기 바란다"고 얘기한 대목에서 잘 드러난다. 정치적 필요와 합의를 위해 희생자에게 이해를 구한다? 뻔뻔한 일이다. 그것도 한 대 때린 일이 아니라 치밀하게 조직적으로 이뤄진 전쟁 범죄를 놓고 말이다. 누구도, 그것이 설사 정부라해도 희생자의 입을 틀어 막은 후 가해자의 죄를 용서해줄 수는 없다. 아무리 외교적 수사와 정당성을 주장해도 그것은 희생자에 대한 폭력이고 정부가 일방적으로 일본에 정치적 용서와 화해를 선언한 것일 뿐이다.
정의, 참회, 용서, 화해
언젠가는 풀어야 할 문제인데 이렇게라도 합의가 됐으니 다행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언젠가 풀어야 할 문제라는 것은 맞는 말이다. 그래서 정부가 나선 것이고 모두 정부가 제대로 된 합의를 이뤄내기를 내심 바랬다. 그렇지만 이번 합의는 문제를 풀기 위해 필요한 순서를 제대로 밟지 않았기 때문에 외교적 야합이 될 수밖에 없고 당사자의 분노를 살 수밖에 없다
합의의 가장 큰 문제는 정의의 언급 없이 합의가 이뤄졌다는 것이다. 정의는 과거의 진실이 밝혀지고 누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확인한 후 그에 대한 처벌이 이뤄지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합의에는 어떻게 정의를 이룰 것인가, 아니 정의의 문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도 빠져있다. 무엇보다 정의의 실현 방법은 희생자가 선택하고 수용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하고 전쟁 범죄인 위안부 문제의 경우 무엇보다 희생자의 의견이 반영돼야 한다. 당사자들이 거부하는 일본 총리의 사과의 말은 정의의 실현이 아니다.
정의가 이뤄지고 나면 참회와 용서의 가능성이 생긴다. 정의가 실현된다고 반드시 가해자가 참회하는 것은 아니다. 특별히 사법적 정의가 이뤄질 경우 가해자의 참회가 이뤄지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면 유감이지만 용서도 이뤄지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참회가 뒤따르지 않아도 사법적 정의는 희생자가 반드시 필요로 하는 절차기 때문에 그냥 건너뛸 수 없다. 정의가 제대로 실현되고 나면 참회가 없어도 희생자가 용서를 하는 경우도 생긴다. 그러나 그것은 전적으로 희생자의 선택이다. 누구도 그것을 강요할 수 없다. 정의를 실현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고, 그 뒤의 참회와 용서 과정도 오랜 시간이 걸린다. 당사자들의 마음이 움직여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당연하다. 쉽게 참회하고 용서할 수 있는 일이었다면 애초 정의의 과정을 필요로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정의, 참회, 용서가 이뤄지고 나면 화해의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것은 정의, 참회, 용서가 이뤄졌다고 자동으로 화해가 이뤄지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참회와 용서가 이뤄진 후에 관계가 회복돼야 하고 서로가 공존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화해는 가장 바람직한 일이고 궁극적인 목적이 되지만 오랜 시간 인내하고 노력해서 도달해야 하는 것이다. 화해 또한 누구도 강요할 수 없다. 그것은 전적으로 가해자와 희생자가 결정할 일이다.
이렇게 복잡한 과정을 정부는 몇 달의 외교 협상으로 끝내 버리고 이제 용서와 화해의 시대가 열린 것처럼 말하고 있다. 희생자가 원하는 정의를 무시하고 더구나 일본 정부에 위안부 문제를 다시는 제기할 수 없는 빌미까지 만들어 놓았으면서도 말이다. 물론 외교적 어려움이 있고 정치적 문제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희생자를 다시 희생시키는 폭력을 저지르면서 정치적 이익을 취하는 것은 어떤 변명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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