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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인가, 폭력인가평화갈등 이야기 /갈등해결 2019. 10. 31. 09:10
한국문화와 힘의 관계
한국문화에서는 관계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관계는 힘에 의해 불평등하게 맺어지고 유지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 관계는 '윗사람 존중', '예의', '도리' 등의 그럴듯한 말로 포장된다. 그런 관계에서 보통 이익을 보는 것은 상대적으로 힘이 많은 쪽이다. 상대적으로 힘이 적은 쪽은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가장 큰 문제는 관계가 불편하고 부당해도 상대적 약자는 문제를 제기하거나 불만을 드러내기 힘들다는 것이다. 힘의 관계가 강조되는 사이에서는 그러므로 '문제'가 잘 표출되지 않는다. 상대적 약자는 힘의 관계를 받아들여 복종하고 상대적 강자는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문제 없음'으로 받아들인다. 흥미로운 점은 상대적 약자는 이런 관계를 '문제'로 인식하고 때로는 '갈등'으로까지 여긴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 안에서의 번민과 문제의식일 뿐이고 밖으로 표출되지 않는 한 '갈등'이라 부를 수 없다.
갈등은 힘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힘이 지나치게 불균형한 사이에서는 갈등이 생기지 않고 어느 정도 힘의 균형이 갖춰줘야 갈등이 생길 수 있다. 갈등은 일방적이 아니라 상호적이기 때문이다. 어느 한 쪽이 자기 맘대로 상황이나 사안을 좌지우지할 수 없을 때, 다시 말해 다른 쪽이 일방적인 결정이나 행동을 저지하거나 유보시킬 수 있을 때에만 갈등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갈등이 생기려면 어느 정도 힘의 균형이 이뤄져야 한다. 특히 힘의 관계를 강조하는 한국문화를 지나치게 따르는 관계라면 우선적으로 힘의 불균형에 균열이 생겨야 갈등이 만들어질 수 있다. 또는 문제 제기가 갈등으로 진화되고 불균형한 힘의 관계를 깨는 역할을 할 수 있다. 물론 여기서 갈등은 변화를 위한 기회가 되는 건설적인 갈등을 의미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약자가 힘을 키워야 하고, 주변이 약자를 지원해야 한다. 적어도 약자가 문제를 제기할 수준은 돼야 갈등이 생길 수 있다.
폭력은 갈등이 아니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시행됐다. 많은 내용이 인간과 인간 사이에 지켜야 할 상식적인 것들로 보이지만 그것이 지켜지지 않기 때문에 법적 조치가 필요해 생긴 법이다. 이 법이 다루는 일들은 '권리 침해'나 '공격'과 같은 부당한 것들이다. 다른 말로 '폭력'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조직 안 인간관계에서 흔히 생길 수 있는 '갈등'으로 희석시키고 싶어 한다. 예를 들어 윗사람, 그러니까 힘을 이용해 자기 할 말 다하고 모욕까지 줄 수 있는 사람은 그냥 후배나 부하 직원과 갈등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자기의 기대 수준에 미치지 않기 때문에 윗사람으로 '정당하게' 행동한 것이라고 생각하니 말이다. 그러나 후배나 부하 직원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갈등이 아니라 부당한 방식을 동원한 일방적 요구고 나아가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폭력이다. 더군다나 윗사람은 할 말 다하고, 후배나 부하 직원은 말을 참거나 변명만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두말할 필요 없이 갈등이 아니다. 상호작용이 없어서 갈등 자체가 만들어지지 않으니 말이다. 그러니 이 상황에서는 갈등의 해결이 아니라 폭력에 대한 대응이 필요하다.
갈등연구의 시각에서 보면 직장내 괴롭힘 금지법은 변화를 만드는 갈등이 생길 수 있도록 약자의 힘을 키우는 법이다. 약자에 대한 폭력을 법으로 제재함으로서 힘에 의존해 만들어지고 유지되는 관계에 경고를 주는 것이고, 그로 인해 약자에게 최소한의 의사를 표출할 공간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법이 잘 정착하고 작동해서 직장 내에서 윗사람이라는, 또는 힘 있는 집단에 속한다는 이유로 상대적 약자에게 힘을 동원한 폭력을 가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그후 제대로 갈등이 생길 수 있을 것이다. 관계, 구조, 문화의 변화가 필요할 때 인간 사이에 생기는 자연스런 상호작용으로서의 갈등 말이다. 물론 그 다음에는 굳이 갈등이 생기지 않아도 대화와 합의로 조기에 문제가 다뤄지고 잘 해결되는 사회문화, 조직문화가 만들어질 것이다. 현재로 보면 까마득한 미래처럼 보이지만 조금씩 변하다보면 언젠가는 눈에 띄는 변화가 만들어지지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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