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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갈등, 친밀감의 역풍평화갈등 이야기 /갈등해결 2019. 8. 29. 10:28
대가족, 갈등의 진원지
미국에서 공부할 때 "가족이 있냐?"는 질문을 심심찮게 받았다. 난 당연히 "YES!"라고 답하곤 했다. 그런데 어느날 한 친구가 말해줬다. 가족이 있는지 묻는 것은 너만의 가족, 그러니까 결혼해서 이룬 핵가족이 있는지를 묻는 것이라고. 그들 상식에서는 결혼을 예상할 수 있는 나이가 된 사람에게 가족은 당연히 핵가족을 의미한다고. 그후로 싱글인 난 항상 "가족이 있냐?"는 서양문화권 사람들의 질문을 받으면 망설였고 결국 설명을 덧붙였다. 그래서 "내 가족은 없고, 부모와 자매.형제가 있다"고 답하곤 했다.
우리에게 가족은 범위가 넓어서 보통 대가족을 의미한다(이하 '대가족' 대신 '가족'을 쓰기로 한다). 그런 가족은 따뜻함을 주어서 많은 사람이 가족으로부터 살아갈 에너지와 격려를 얻는다. 하지만 다른 한편 가족은 힘든 짐이 되기도 한다. 가족 안에서 갈등이 생기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럴 때 가족은 당연히 버거운 짐이 되고 삶의 질을 낮추거나 심지어 파괴하는 것이 된다.
우리 문화의 가족 내에서 갈등이 많이 생기는 근본적인 이유는 접촉면이 넓고 친밀감이 강하거나, 또는 친밀감을 내세우고 강조하기 때문이다. 갈등이 관계가 있는 개인이나 집단 사이에 생긴다는 점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가족이라면 당연히 자주 접촉하고 친밀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이유로 사생활의 경계를 넘는 일이 많다보니 갈등이 생길 가능성도 높아지는 것이다. 친밀감을 다른 사람의 생활과 삶의 방식을 참견해도 되는 '자격'을 갖게 된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도 다른 사람의 삶에 참견할 권리가 없다는 것을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수용한다면 가족 내 갈등은 상당히 줄 가능성이 있다.
'가족'에 현혹되지 않기
다른 이유는 이익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부모님 부양, 유산, 제사 모시기, 산소 돌보기, 채무 관계 등은 물론이고 형제.자매, 친족 사이의 비물질적 지원과 연대, 만족감, 존중 등 이익과 관련된 사항은 수도 없이 많다. 이런 이익 앞에서는 모두 자기 이익을 우선적으로 쫓으려 하기 마련이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이자 권리이기도 하다. 문제는 가족 내 이익의 공유와 개인 이익 추구가 충돌하면서 갈등이 많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특히 문화적, 도덕적, 전통적 가치가 개입되기 때문에 '가족'을 둘러싼 상식과 비상식, 개인 이익과 집단 이익, 윤리와 비윤리 등에 대한 상이한 판단이 대립하면서 갈등이 파괴적으로 전개되는 일이 잦다. 친밀감이 있다면 그러지 않아야 하는데 말이다. 이 또한 누구든 자기 이익을 쫓을 권리가 있음을 인정하고 공유하는 일에 대해서는 공동 부담과 분배를 합의하면 될 일이지만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는 그런 쿨한 접근이 쉽지 않다. 가족과 전통에 대한 가치 판단과 행동 평가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대가족 구성원들 사이 소통 태도와 방식이다. 평소엔 친밀감을 가장 큰 장점으로 내세우지만 이견이 생기면 친밀감은 힘을 잘 발휘하지 못한다. 잦은 접촉을 토대로 한 직접 소통은 사라지고 우회적으로 정보를 얻으려 하고, 그로 인해 가십과 오해가 번져간다. 황당한 것은 말과 행동은 돌고돌아 결국 당사자에게 알려진다는 것이다. 비슷하지만 또 다른 것은 직접적이 아닌 우회적으로 얻은 정보로 상대에게 문제를 제기하고 비난하는 우를 범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을 비난했다는 얘기를 전해듣고 화를 냈다가 갈등을 만들거나 악화시키는 일이 자주 벌어진다. 우회적 정보 획득이 잦아지면 구성원들 사이 지원과 연대, 연합 형성과 폐지 등이 시시때때로 일어나고 그로 인한 갈등도 잦아진다. 구성원이 많을수록 이런 일은 많아진다. 정보의 경로를 정확히 확인해 판단하고 '말하기'보다 '듣기'를 먼저하면 재앙을 막을 수 있지만 '친밀함'은 그런 신중하고 예의바르고 전략적인 접근을 무력화한다.
그렇다면 가족 갈등을 예방하고 줄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가? 중요하고 현명한 태도 중 하나는 '가족'이란 말에 현혹되지 않는 것이다. '가족'이 모든 것을 이해하고 무마해줄 것이라고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가족 구성원들은 각자 자기 이익을 추구할 권리가 있는 사람들이고 그런 이유로 당연히 대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친밀감'이 모든 것을 해결할 것이라고 착각하지도 않아야 한다. '친밀감'은 긍정적인 말이지만 그것은 각자 권리와 삶의 영역을 존중하는 적당한 거리와 예의를 유지하지 않을 때 언제든지 깨질 수 있고, '친밀감'이 가족 갈등을 예방하고 해결하는 열쇠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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