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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과 분열을 넘어 평화적 공존으로평화갈등 연구/갈등해결 2015. 5. 4. 05:30
갈등과 분열을 넘어 평화적 공존으로
정주진
갈등과 대면하기
갈등은 인간관계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것이다. 갈등은 현재의 부당하고 바람직하지 않은 상황을 개선하고 당사자들이 공동으로 바람직한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갈등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갈등 자체보다는 당사자들과 주변의 갈등 대응 방식 때문이다. 갈등이 긍정적 변화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설명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가슴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반응을 보인다. 그들에게 갈등은 건강한 일상을 망치는 아주 불편한 상황일 뿐이다.
사람들이 갈등을 불편해하는 가장 큰 이유는 예측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보통 자신이 가진 지식, 경험, 상식에 근거해 진행되는 상황에 익숙하고 그런 상황 전개를 편안해한다. 그런데 갈등의 전개 방향을 예측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것은 갈등이 항상 혼자의 문제가 아닌 상대가 있는 문제기 때문이다. 자신의 갈등을 전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며 항상 상대의 생각과 대응에 따라 변하는 갈등 상황에 대응해야 한다. 이렇게 예측과 통제가 어려우니 갈등에 직면한 사람은 편할 수가 없다. 다음으로 갈등을 불편해하는 이유는 갈등이 관계의 문제기 때문이다. 관계가 전혀 없거나 향후 관계가 지속될 가능성이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갈등이 발생하지 않는다. 교회 신자들 사이에서 간혹 심각한 갈등이 발생하는 이유도 그들 사이의 관계가 밀접하고 그런 관계가 미래에도 계속될 것을 자신들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은 친밀한 관계 안에서 더 많이 갈등에 직면하고, 그런 이유로 갈등의 영향을 많이 받으며, 그 결과 갈등을 불편해한다. 또 다른 이유는 해결이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인들이 겪는 갈등은 자신과 상대편과의 문제만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과도 관련된 문제가 되기 때문에 더 복잡하고 해결이 힘들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갈등을 해결하기보다 외면, 방치, 봉합하는 선택을 한다. 그것이 관계를 더 악화시키지 않는 현명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편한 갈등을 피하고 싶어 한다. 갈등이 생겨도 애써 모른체하거나 자신이 갈등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갈등이 저절로 사라지기를 바라지만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어느 순간 중단된 것 같지만 그것은 갈등이 잠복기로 접어들었거나 새로운 갈등으로 변화할 준비를 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갈등에 대응하는 가장 현명한 방법은 당황하지 않고 갈등과 대면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갈등에 대면하기 위해 가장 먼저 키워야 할 능력은 갈등에 대한 이해와 분석력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갈등은 인간관계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이고 건설적으로 대응할 때 새로운 관계와 바람직한 미래를 만들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이런 기본 이해에 더해 자신의 갈등을 객관화시켜 분석하는 것이 필요하다. 자신이 왜 특정 입장을 가지게 됐는지, 그로부터 무엇을 얻고자 하는지, 그런데 자신이 정말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분석해보는 것이다. 똑 같은 방식으로 상대의 입장과 필요도 분석해봐야 한다. 그렇게 하면 자신은 물론 상대도 훨씬 잘 이해할 수 있고 원만한 합의와 해결을 위해 무엇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지도 명료해 진다. 최소한 상대를 무조건 비난하고 공격하는 일은 피할 수 있다. 다음으로 관계를 포기하지 않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를 상종 못할 사람이나 제거해야 할 적으로 대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상대를 부정적으로 언급하거나, 또는 상대의 약점만을 골라 공격하거나 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갈등의 해결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대화의 가능성을 없애는 것이고 되돌릴 수 없는 관계의 단절로 가는 길이다. 대화와 해결을 원한다면 더 중요한 것은 상대의 선정적인 비난과 공격에 같은 식의 대응을 피하고 자신의 원칙과 방향을 유지하는 것이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양쪽이 부정적 방식으로 계속 상호 대응하면 해결의 가능성은 점점 낮아지게 된다. 특별히 관계가 공동체 유지의 핵심이 되는 교회 안에서는 당사자들이 갈등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이해함으로써 상호 공격과 관계 단절로 접어들지 않도록 공동체 차원에서의 조기 대응이 필요하다.
공동의 문제로 삼기
갈등에 대면하기 위해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능력은 갈등을 자신과 상대가 직면한 공동의 문제로 이해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갈등으로 가장 많은 피해를 입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갈등은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상대가 있는 문제다. 이 당연한 사실은 상대도 나와 같은 피해를 입고 있음을 말해준다. 피해는 굳이 한 쪽이 다른 쪽에게 해를 입혔다는 의미가 아니라 갈등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가져오는 부정적 영향을 말한다. 갈등으로 일상생활의 리듬이 깨지고, 신체적 정신적 어려움을 겪으며, 관계와 공동의 미래에 금이 가는 경험은 갈등 당사자들 모두가 겪는 일이다. 물론 당사자들 사이에 힘의 불균형이 심하다면 상대적으로 약한 쪽이 강한 쪽보다 실질적으로 더 많은 부정적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갈등이 미치는 부정적 영향이 단지 물질적이거나 가시적인 것에 한정되지 않고 현재와 미래의 삶 전체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생각하면 단선적인 시각으로만 해석할 수는 없다. 결국 당사자들은 동병상련의 관계에 처한 사람들이고 적어도 직면한 갈등과 관련해서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갈등을 공동의 문제로 삼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 노력이 필요하다. 갈등은 사람과 관계에 대한 문제지만 당사자들이 해결을 위해 다뤄야 하는 것은 갈등을 야기한 특정 현안이다. 물론 상대가 그 현안에 다르게 대응했다면 갈등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해 상대편을 비난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당사자들이 직면한 현실은 갈등이 이미 발생했으며 그 현안을 다루지 않으면 갈등을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런데 현안이 아니라 사람에 집중하면 상대의 대응 방식은 물론 급기야 품성까지 비난하게 된다. 다뤄야 할 갈등 현안에 대한 관심은 줄어들고 감정적 상호 대응에 초첨이 맞춰지게 된다. 갈등은 시간이 지날수록 악화되고 관계와 소통이 단절돼 결국 갈등을 제대로 분석할 수도 없고 해결책을 모색할 수도 없는 상황이 된다. 이런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는 갈등을 공동의 문제로 삼아야 하고 무엇보다 문제에 집중해야 한다.
갈등을 공동의 문제로 삼기 위해서는 자신과 상대에게 영향을 주는 주변 사람들과 환경을 두루두루 살피는 것도 필요하다. 한국사회의 경우 한 사람이 가진 관계의 그물망이 넓기 때문에 갈등 당사자들이 갈등을 완전히 독립적으로 이해하고 대응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갈등의 발생과 전개에 주변이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당사자들 스스로 자신의 갈등이 주변에 미치는 영향도 잘 알고 있다. 때문에 해결을 모색할 때도 안테나를 가동시켜 주변의 영향을 민감하게 탐지한다. 주변의 영향은 당사자들이 어느 정도 극복해야 되는 문제지만 그렇다고 절대 무시할 수는 없다. 주변 때문에 당사자들 사이의 합의가 깨질 수도 있고 한 쪽이 다음 날 다른 얘기를 할 수도 있다. 주변을 두루 살피고 영향을 파악한다면 자신은 물론 상대가 처한 상황도 이해할 수 있고 갈등 현안에 보다 객관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 무엇보다 무조건 상대의 생각과 의지를 폄하하거나 매도하는 일은 피할 수 있다.
갈등을 공동의 문제로 삼고자 할 때 가장 필요하면서도 힘든 일은 대화의 시도다. 갈등은 당사자들의 대화를 통해 해결할 수 있다. 당사자들의 직접 접촉 대신 제삼자가 중간자 역할을 해 해결을 도울 수도 있다. 그러나 최후로 만나 합의를 해야 하는 사람들은 어찌됐건 당사자들이다. 그렇다면 대화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갈등이 최악으로 치닫기 전에 당사자들이 만나 서로가 이해하고 있는 갈등과 현안, 그리고 각자의 어려움과 절실한 필요를 공유한다면 갈등은 조기에 해결될 수도 있고, 상호 비난과 공격이 없이 건설적으로 전개될 수도 있으며, 악화되지 않을 수도 있다. 문제는 관계가 소원해지거나 중단되고 소통 채널을 상실한 당사자들이 대화를 시작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화의 시작을 위해서는 주변의 도움이 필요한데 이것은 자존심 때문에 먼저 대화를 제안할 수 없는 당사자들의 체면을 세워주고 명분도 제공해주는 역할을 한다. 교회 안에서 갈등 당사자들의 얘기를 듣고 대화 자리를 마련하는 사람은 주로 성직자지만 지혜롭고 존경받는 신자가 그 일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화를 강요해서는 안 되며 때로 당사자들이 준비될 때까지 양쪽을 오가며 메신저 역할을 해야 한다.
갈등을 공동의 문제로 삼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갈등에 맞선 우리’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갈등에 처한 당사자들은 상호의존적이다. 상대를 적으로 취급하고 증오하는 당사자들의 경우에는 절대 동의하기 싫은 내용이겠지만 사실이다. 갈등은 상대가 있는 문제기 때문에 해결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상대의 생각, 대응, 합의 등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혼자 문제를 덮을 수 있지만 그것은 갈등의 해결이 아니라 외면이고 항상 재연될 갈등에 대면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어떤 것이든 자신의 선택이겠지만 갈등을 해결할 생각이라면 자신과 상대의 상호의존적 관계를 외면해선 안 된다. ‘갈등에 맞선 우리’는 갈등 당사자들이 기억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점이다.
평화적 공존으로 나아가기
갈등 현안이 합의로 종식됐다고 해도 갈등을 야기한 근본원인이 규명되고 바뀌지 않았다면 갈등이 해결됐다고 볼 수 없다. 노사 협상으로 파업이 끝나도 근본원인이 된 노사 협력 체계와 참여적 의사결정의 부재가 해결되지 않았다면 그 다음해 다시 파업이 생기게 되고, 교회 안에서 두 신자 사이의 갈등이 종식돼도 갈등에 기여한 교회 구조가 그대로면 향후 다른 신자들 사이에 비슷한 갈등이 생기게 된다. 또한 문제가 종식돼도 관계가 회복되지 않으면 평화적 공존이 이뤄지지 않고 갈등의 재발 가능성은 상존하게 된다. 그러므로 갈등 현안의 해결은 근본원인의 제거와 관계 회복은 물론 평화적 공존 노력의 시작을 의미한다. 근본원인의 제거가 갈등 재발을 막기 위한 구조와 절차 등 기능적인 면에 초점을 맞춘다면 관계의 회복은 상호 인정과 소통의 회복 등 감정적인 면에 주목한다. 구조의 개선과 변화가 이뤄진다 해도 관계의 회복이 없다면 평화적 공존은 힘들 수밖에 없다.
평화적 공존의 전제가 되는 관계 회복은 개인과 사회 두 측면에서 다뤄져야 한다. 관계 회복을 위한 상호 잘못의 인정, 용서, 화해 등은 개인의 일이기도 하지만 공동체나 사회의 일이기도 하다. 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발생하는 갈등은 당사자들이 속한 공동체나 사회에도 편 가르기와 분열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서 발생한 개인의 갈등이 결국 교회 전체의 분열과 해체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당사자들의 관계 회복과 평화적 공존은 갈등 현안의 종식 후 공동체나 사회를 다시 세우는 일이 되곤 한다. 공동체나 사회는 당사자들의 관계 회복을 위해 자연스런 접촉 기회를 제공하고, 협력 작업을 지원하며, 묵은 감정을 공유하고 정리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서로를 인정하고 용서하며 화해할 명분을 제공해 줄 수 있다. 신앙공동체인 교회의 경우에는 갈등 현안의 종식 이후 당사자들은 물론 주변 사람들 사이의 감정의 찌꺼기를 정화하고, 관계를 회복하며, 신앙의 토대 위에서 공동의 미래를 계획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런 과정은 신자들에게 신앙공동체인 교회의 정체성을 재확인하고 기독교인으로서 타인과의 평화적 공존을 재다짐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관계 회복을 위해 당사자들은 물론 공동체나 사회의 적극적인 노력이 요구되지만 당사자들에게 압력이 가해져서는 안 된다. 교회의 경우 공동체의 안녕을 위해 당사자들에게 용서와 화해를 강요하고 때로는 지도자들이 전체 앞에서 당사자들의 용서와 화해를 선언하기도 한다. 그러나 압력과 강요, 일방적인 선언으로 당사자들의 진정한 화해와 관계 회복, 분열된 공동체의 회복, 나아가 모든 신자들의 평화적 공존은 성취되지 않는다. 그런 목표는 먼저 당사자들의 아픔을 공유하고 용서와 화해를 위한 정교한 과정, 세심한 배려, 공동체 구조의 변화가 동반될 때 달성될 수 있다. 갈등을 해결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평화적 공존이며 이를 위해서는 당사자들이 존중되고 공동체가 지원하고 협력하는 평화적 과정이 담보돼야 한다. 신자들의 평화적 공존이 필요한 교회는 그 어떤 공동체보다 갈등과 분열을 극복하기 위해 평화적 과정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이 글은 가톨릭 잡지인 <사목정보> 2014년 3월 호에 실린 글입니다. 무단 복사 및 배포를 할 수 없으며 인용시에는 출처와 저자를 밝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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