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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기초 6 평화로운 삶과 국가 폭력평화갈등 이야기 /평화 2018. 10. 15. 15:33
개인의 삶과 구조적 폭력
평화로운 삶은 어떻게 성취될 수 있을까? 이 단순한 질문에 답하는 게 쉽지는 않지만 많은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개인의 태도와 행동이 변하면 평화로운 삶을 살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아예 틀린 답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정답도 아니다. 우리의 평화는 개인의 태도와 행동, 그리고 결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른 차원에서 제공된 원인에 의해 좌우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것은 평화로운 삶을 깨거나 방해하는 폭력을 통해 명확히 드러난다.
폭력 중 구조적 폭력은 대부분 합법적이고 정당한 수단, 그러니까 사회나 공동체의 법, 규제, 관례, 그리고 그것을 실행하는 체계와 과정을 포함하는 폭력적 구조에서 야기된다. 그리고 폭력적 구조는 개인과 집단의 거의 모든 삶에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가정폭력은 저임금 노동의 만연과 실업률 증가로 인해 발생하고, 개인과 집단 사이 대립과 폭력적 관계는 강자에게 유리하고 약자에게 불리한 법과 규제 때문에 생기는 경우가 많다. 최근 늘고 있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과 관련된 건물주와 임차인의 갈등은 그런 사례 중 하나다. 물론 어떤 것이 원인이 됐든 폭력을 행하는 최종 주체가 개인이므로 개인의 책임을 외면할 수는 없다. 그러나 개인에게만 초점을 맞춰 폭력을 언급하면 구조적 폭력을 개인화하고 국가 및 사회의 책임을 외면하는 중대한 실수를 범하게 된다.
개인과 집단의 평화로운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국가다. 국가는 전 세계 거의 모든 개인과 집단이 속해 있는 가장 일반적인 정치 주체다. 개인과 집단은 자신의 자유를 일부분 포기하는 대신 국가에 안전을 의탁한다. 그러나 국가는 어떤 개인이나 집단이 통치하느냐에 따라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심각하게 제한 내지 침해하고 나아가 다양한 폭력을 행사하는 주체가 되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국가폭력이다. 실제 많은 국가가 국민에게 폭력을 가하고 국민은 희생자가 되곤 한다. 가장 흔한 것이 바로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법, 규제, 제도 등 합법적인 수단을 통해 가해지는 구조적 폭력이다.
평화적 생존권과 국가 폭력
그런데 국가폭력에는 구조적 폭력만 있는 것이 아니다. 국가는 직접적 폭력과 문화적 폭력을 가하기도 한다. 많은 국가폭력의 사례 중 전쟁을 준비하고 무력 강화에 매진하는 국가의 사례를 생각해보자. 국가는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사상과 이념을 만들고 그것을 국민에게 주입하거나 강요한다. 두말할 필요 없이 이것은 문화적 폭력이고 피해자는 계속 거기에 노출되고 세뇌당하는 국민이다. 문화적 폭력을 토대로 해 국가는 전쟁 준비와 무기 축적 및 경쟁을 합법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법, 체계, 절차 등을 만든다. 그리고 그것에 문제를 제기하거나 저항하는 사람들을 법과 제도를 이용해 억압하는 구조적 폭력을 가한다. 신체에 해를 입히거나 구속하는 직접적 폭력을 가하기도 한다. 구조적 폭력의 토대 위에서 전쟁이나 무력충돌이 발생하면 다수 국민의 신체에 해를 입히는 직접적 폭력이 생긴다. 신체의 자유를 구속하고 생명을 위협하는 징집도 이뤄진다. 전쟁이나 무력충돌이 없어도 그런 위험에 계속 노출되면서 국민은 평화적 생존권을 침해받는다. 평화적 생존권은 누구나 전쟁의 위험에 노출되지 않고 신체적 안전과 생명을 보장받을 권리를 말한다. 즉 가장 기본적인 평화를 누릴 권리를 말한다.
한반도에 사는 우리는 특별히 국가폭력의 피해자로 살고 있다. 한국전쟁 이후 계속된 남북의 군사 대결과 긴장, 안보담론과 이념 대결 등은 개인과 집단 사이의 다툼과 심지어 물리적 충돌도 야기했다. 나아가 국가는 법, 제도, 공적 체계를 이용해 상시로 개인의 생각과 행동을 감시 및 통제하고 처벌까지 했다. 무엇보다 국가가 우리의 평화적 생존권을 박탈했기 때문에 전쟁과 무력충돌의 가능성이 상존하는 상황에서 살아왔다. 올해 초부터 시작된 남북과 북미의 관계 변화가 예상치 못한 속도와 수준으로 진행되면서 무력 긴장이 완화되고 있다. 하지만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의 평화적 생존권은 여전히 보장되지 않고 있다. 전쟁 준비를 정당화하는 정책, 전쟁 준비를 위한 징집제와 무력 증강 및 군사훈련을 위한 막대한 국방 예산 등을 가능하게 하는 법과 제도도 그대로다. 이런 구조는 우리의 평화로운 삶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국가폭력의 시각에서 보면 한국전쟁을 완전히 끝내고 한반도에 평화체제를 정착시키는 일은 남북의 정치적 관계와 변화를 넘어 우리 삶에 가해지는 국가폭력을 줄이는 것이다. 동시에 평화로운 삶을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물 중 하나를 없애는 것이다. 물론 평화체제가 선언된다고 해도 우리 각자의 삶에 당장 큰 변화가 있진 않을 것이다. 종전과 평화체제의 수립은 평화만들기(peacemaking), 다시 말해 싸움을 끝내고 평화로운 공존을 위한 시작이기 때문이다. 거기서부터 싸움 없는 평화를 유지하고 관계를 회복하며 평화로운 공존의 정착을 위한 새롭고 힘든 여정이 시작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더 이상 국가폭력의 희생자로 살지 않기 위해 정치적 변화를 삶의 변화로 바꾸는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 그것이 각자 평화로운 삶의 주인이 되는 길이다.
* 위 글은 서울 YWCA의 월간지 <서울YWCA>의 '우리가 꿈꾸는 평화세상' 연재를 위해 기고한 글이며 잡지가 출판된 이후 여기에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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