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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 갈등의 특징과 해결 방향평화갈등 연구/갈등해결 2015. 5. 4. 01:30
한국사회 갈등의 특징과 해결 방향
정주진
I 갈등 증가의 원인 탐색
1 공공갈등의 증가
한국사회에서 갈등이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시작한 것은 2000년 전, 후의 시기다. 이 때 한국사회는 온갖 갈등으로 몸살을 앓았고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어느 누구도 그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이 시기에 전국을 뒤흔든 갈등은 동강댐 건설 갈등, 남북정상회담과 관련된 이념 갈등, 고양시 러브호텔 건설 갈등, 의약분업 갈등, 고속철도 천성산 구간 건설 갈등, 부안 방폐장 건설 갈등,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 관련 갈등 등이었다.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것들이다. 매일 뉴스를 통해 보도되는 각종 갈등은 갈등에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한국사회를 혼란에 빠뜨렸다.
위에서 언급한 대형 사회갈등의 특징은 모두 공공정책과 관련된 갈등이라는 것이다. 갈등해결 연구 영역에서는 이런 종류의 갈등을 ‘공공갈등(public conflict)’이라 부른다. 공공갈등은 주로 공공정책의 영향을 받는 당사자들이 정책의 입안과 실행을 담당하는 공공기관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발생한다. 문제 제기에도 불구하고 정책이 강행되면 강력한 저항이 뒤따르게 되고 갈등은 대립을 넘어 폭발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공공갈등이 2000년 이후 크게 증가했고 한국사회의 갈등 증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공공갈등의 제일 큰 특징은 민주사회에서 발생하는 갈등이라는 것이다. 억압적인 사회에서는 시민이 공공정책에 반대할 수 있는 적절한 환경이 조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갈등이 제대로 형성되고 전개되지 못한다. 반면 민주사회에서는 민주주의의 수준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공공 서비스를 제공하는 공공기관과 서비스를 소비하는 시민 사이에 상호 소통의 관계가 형성되고 관계의 질과 수준에 따라 공공갈등이 발생한다. 공공갈등이 형성되고 제대로 전개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은 일정 수준에 도달한 시민의식과 민주주의다. 시민들은 자신들에게 영향을 미칠 정책 결정에 참여를 요구할 수 있을 정도의 시민의식을 갖추고 있어야 하고 중앙정부를 포함한 정부기관은 시민을 배제시킨 정책 결정을 비판하고 참여를 요구하는 시민을 억압하거나 불이익을 주지 않을 정도가 되어야 한다 (정주진, 『갈등해결과 한국사회』 (서울: 아르케, 2010), pp. 55-63 참조). 이런 최소한의 조건에 기초해 공공기관과 시민의 관계가 성숙하면, 즉 양측의 관계가 상호 존중과 협력(collaboration)에 기초한 비교적 수평적 관계가 될 경우 공공갈등이 일어날 가능성은 줄어든다. 그러나 관계가 수직적이어서 공공기관이 여전히 일방적으로 정책을 결정하고 시민들에게 따를 것을 요구할 경우에는 공공갈등이 일어날 가능성은 현저하게 높아진다.
공공기관과 시민의 관계, 그리고 공공갈등 발생의 상관관계는 양측이 자신과 상대를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의해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 공공기관이 스스로를 공공 서비스 제공자가 아니라 시민을 다스리는 통치자로, 시민들을 공공정책의 대상으로 규정한다면 공공기관에게 있어 일방적인 정책 결정과 실행은 당연한 것이 된다. 시민이 스스로를 공공정책의 대상이 아니라 결정 권리를 가진 주체로, 공공기관을 공공 서비스를 제공하는 봉사자로 여긴다면 공공기관의 일방적인 정책 결정과 실행은 시민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 된다. 자신과 상대에 대한 이런 규정 차이가 공공정책을 둘러싼 공공기관과 시민 사이의 갈등을 야기한다. 민주주의가 성숙한 사회에서는 이런 규정의 간극이 크지 않다. 공공기관은 자신이 정책 결정의 권한을 부여받았지만 동시에 시민에게 질 좋은 공공 서비스를 제공할 의무를 가진다고 규정하기 때문에 시민 참여와 의견 수렴을 위해 노력한다. 시민은 자신이 정책 결정에 참여할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공공기관을 전문 지식과 경험을 가진 공공 서비스 제공자로서 인정한다. 결국 한국사회에서 공공갈등이 증가하는 주요 원인은 민주주의가 여전히 과도기를 겪고 있는 가운데 자신과 상대 역할 규정에 있어서 공공기관과 시민 사이에 큰 간극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공공기관은 시민에게 공공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는 점을 일부분 받아들이고는 있지만 여전히 전문적 지식과 경험을 가진 자신의 일방적인 결정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반면 시민은 자신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정책을 공공기관이 일방적으로 결정하고 통보하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당사자인 자신의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체계가 마련돼 있지 않은 것은 정당하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공공갈등의 증가는 민주주의의 진전과 함께 발생하는 불가피한 사회 현상이다. 그렇다면 공공갈등에 효율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새로운 구조를 만드는 것 또한 불가피한 일이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아직 공공갈등에 효율적으로 대응하고 당사자 참여를 통한 해결 구조와 기제를 마련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이 변화되지 않는다면 공공갈등의 증가와 함께 한국사회의 갈등도 계속 증가하게 될 것이다.
2 사회의 변화
한국사회는 한국에 사는 사람들조차 따라잡기 버거울 정도로 빠른 변화를 보여 왔다. 특별히 지난 20여 년 동안 정치, 경제, 문화 등 사회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큰 변화가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민주화가 이뤄졌고 민주주의가 정착된 사회가 되었다. 경제적으로는 개발도상국을 지나 선진 산업국가의 대열에 합류했다. 문화적으로는 전통적 생활 방식이 거의 사라지고 핵가족 중심의 사회가 되었으며 개인주의 문화가 확산됐다. 짧은 기간 동안 이뤄진 사회 변화와 함께 새로운 갈등도 등장했다. 일부는 그동안 잠재해 있던 사회 구성원들 사이의 불협화음이 갈등으로 폭발된 경우고 또 다른 일부는 사회의 변화와 함께 자연스럽게 등장한 것들이다.
정치적으로 민주주의가 정착돼 가면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위에서 언급한 공공갈등의 등장과 증가다. 갈등은 관계된 당사자들이 상호 작용하면서 서로에게 일정 수준의 제재를 가할 수 있을 때 형성된다. 과거 민주주의가 정착되지 않은 시절 나타난 정부와 시민들의 대립은 갈등이라기보다 주로 정부의 억압과 그에 대한 시민의 저항에 가까웠다. 힘 있는 정부나 공공기관에 의해 사회 문제는 잠재 상태로 머물거나 잠시 수면으로 등장했다가 사라지곤 했다. 정부 또는 공공기관과 시민 사이의 극심한 힘의 불균형 때문에 사회 문제가 갈등으로까지 전개되지 못했다. 민주주의가 정착된 이후 정부 또는 공공기관과 시민 사이 극심한 힘의 불균형이 해소되고 시민 의식이 성장하면서 갈등이 형성 및 전개되고 그것을 통해 사회 문제가 비판적으로 다뤄지게 됐다. 다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한국도 민주주의 사회에서 흔히 발견되는 공공갈등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정치적 변화와 함께 등장한 또 다른 갈등은 이념 갈등의 확산이다. 과거 군사 정권 또는 보수 정권이 집권한 상황에서는 극심한 힘의 불균형으로 이념 갈등이 형성되기 힘들었다. 그러나 1997년 정권 교체와 그 후 진행된 남북관계 개선 노력과 함께 이념 갈등이 한국사회의 주요 갈등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특별히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형성된 이른바 ‘남남갈등’은 정권의 교체로 다른 이념적 배경을 가진 집단들 사이이 극심한 힘의 불균형이 어느 정도 해소됐기 때문에 형성될 수 있었다.
경제적 변화로 한국은 소위 선진 산업국 클럽이라 불리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Organization for Economic Co-operation and Development)의 회원이 되었다. 짧은 기간에 이뤄진 경제 성장은 많은 면에서 생활에 변화를 가져왔다. 경제 성장과 함께 부의 축적, 재산권 보호, 삶의 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는 새로운 갈등이 나타났다. 소각장, 쓰레기 처리장, 공동 주택 소음, 복지시설 기피 등을 둘러싼 소소한 갈등은 물론 빈부격차 심화와 상대적 빈곤 등 고도 산업사회에서 나타나는 계층 사이의 갈등도 주요 사회 갈등의 하나가 되었다.
정치적, 경제적 변화와 함께 문화적 변화도 새로운 갈등을 만들고 갈등을 증가시키는데 기여했다. 과거의 전통적 생활 방식이 점차 사라지고 사회의 변화 속도가 빨라지면서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공유한다고 여겨지는 ‘한국문화’에 대한 해석이 모호해졌다. 집단주의 문화의 성격이 강한 것으로 규정되던 한국문화는 과거에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세분화된 하위문화(sub-culture)들을 포함하게 되었고 그런 하위문화의 영향을 받는 개인들이 더 많아졌다. 이른바 한국문화 안에도 교차문화적(cross-cultural) 상황이 빈번해진 것이다. 과거에 한국인의 특징으로 거의 언급되지 않았던 개인주의 문화적 특징도 산업화와 함께 한층 더 강화됐고 개인 또는 집단에 따라 집단주의 문화보다 개인주의 문화의 특징을 더 드러내는 경우도 생겼다. 이런 문화적 변화와 혼재, 그리고 개인 또는 집단 사이의 문화적 차이로 인한 소통과 이해의 부족도 갈등의 발생과 증가에 기여했다.
3 해결 기제의 부재
갈등은 인간 사회 어느 곳에나 존재하고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사는 모든 인간은 불가피하게 갈등을 겪는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사회는 갈등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해결하는 기제를 가지고 있다. 갈등해결(conflict resolution)에 대한 연구가 이뤄지기 전에 이미 세상에는 많은 갈등 해결 방식이 있었다. 그런 방식들은 대부분 특정 민족 또는 종교 집단의 구성원들에 의해 고안돼 후손들에게 전해진 전통적인 방식들이다. 전통적 갈등해결 방식은 개인의 선택과 참여적 과정을 중요시하는 현재의 시각으로 본다면 비판의 여지가 없는 것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체의 조화와 구성원들 사이의 원만한 관계 유지를 위해 꼭 필요한 사회적 기제였다. 고도의 산업사회가 되기 전 한국사회에도 공동체마다 그런 사회적 기제가 있었지만 이제는 거의 찾아보기가 힘들다.
갈등이 꾸준히 증가한다는 것은 곧 갈등이 축적되고 있다는 의미다. 갈등이 축적되는 것은 물론 해결되는 갈등보다 해결되지 않는 갈등이 많기 때문이다. 다른 사회와 특별히 다를 것 없는 한국사회에 유난히 갈등이 많아 보이는 것도 해결되지 않는 갈등이 많기 때문이다. 갈등을 잘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기제가 필요하다. 여기서 말하는 사회적 기제는 공적 영역에서든 사적 영역에서든 제대로 작동해 사람들의 문제를 푸는데 실질적으로 기여하는 기제를 말한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한국사회에는 아직 그런 기제가 없다.
참여정부는 갈등에 관심이 많았다. 각종 사회 갈등이 폭발하던 시기에 출범했기 때문에 갈등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참여정부는 출범과 동시에 정부 차원에서 갈등을 해결할 기제를 만들고자 했다. 지속가능발전위원회를 통해 2003년부터 갈등해결을 제도화시킨 나라들의 사례를 연구한 후 ‘갈등관리기본법’ 제정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그 후 2007년 대통령령인 ‘공공기관의 갈등 예방과 해결에 대한 규정’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 규정은 규정에 머물뿐 갈등의 해결을 위한 사회적 기제의 계발에 기여하지 못했다. 참여정부는 또한 2004년 한탄강 댐 건설을 둘러싼 갈등을 갈등해결 기제 중 하나인 ‘조정(mediation)'을 통해 해결해보려 했으나 전문적 지식과 경험의 부족으로 실패했다.
현 정부도 갈등의 예방과 해결 필요성을 인정했다. 정부는 대통령소속 사회통합위원회를 출범시키고 갈등을 효율적으로 예방하고 관리할 방안을 찾았다. 참여정부처럼 현 정부 역시 선진국의 사례를 연구하고 한국사회에 적용할 방법을 모색해 오고 있다. 2011년 말 사회통합위원회는 ‘국가공공토론위원회’를 설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것은 프랑스의 '국가공공토론위원회(CNDP)'를 참고한 것으로 국책사업 실행과 관련한 갈등을 이해 관계자들 사이의 대화를 통해 예방하고 해결한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사회적 경험, 전문 지식, 인적 자원, 정부의 의지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어려움이 많아 실질적인 사회적 기제의 마련이라는 점에서 과연 성과를 낼 수 있을지 낙관하기 힘들다. 다른 한편으로 갈등에 대응하는 공공기관들과 실무자들의 태도에 변화가 없는 상태에서 위원회가 설치된다 할지라도 사회갈등의 해결에는 별 도움을 주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서울시는 7월까지 ‘갈등 예방 및 해결을 위한 조례’를 마련한다고 발표했다. 서울시는 사업의 계획 및 실행과 관련해 예상되는 갈등을 미리 분석함으로써 갈등을 예방하는데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와 관련해 공무원들의 갈등관리 교육을 체계적으로 실시한다는 계획도 발표했다. 서울시 이외에 다른 자체단체들도 이미 조례를 제정했거나 제정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또한 갈등을 조정 또는 심의할 조직을 만들고 있다.
중앙정부를 포함한 공공기관들의 사례들을 종합해보면 갈등을 예방하고 해결할 사회적 기제, 특별히 제도화된 기제가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됐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사회적 기제는 이른바 ‘갈등해결’이라는 연구를 통해 체계화된 실천 방식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갈등에 관계된 모든 당사자들이 참여해 대화(dialogue)와 협력(collaboration)을 통해 갈등을 예방하고 해결하는 방식을 말한다 (정주진, 『갈등해결과 한국사회』 , pp. 121-137 참조). 그러나 무엇을 만들고 그것을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지에 대한 기본 이해와 합의가 부족하다. 또한 왜 다른 나라에서 그런 기제가 작동하는지를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측면에서 분석하고 비슷한 기제가 한국사회에서 작동하기 위해 어떻게 창의적인 수정과 적용이 이뤄져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도 부족하다. 특별히 다른 나라에서 제도화된 기제가 한국사회에 도입돼 실제로 갈등의 예방과 해결에 기여할 수 있으려면 그 이전에 어떤 사회적 토대를 만들어야 하고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논의도 부족하다.
II 갈등 전개의 특징
1 갈등의 방치와 파괴적인 전개
한국사회의 갈등이 해결되지 않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갈등이 제대로 다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갈등이 제대로 다뤄지기 위해서는 세 단계에서 대응과 개입이 필요하다. 첫 단계는 문제가 생기고 그와 관계된 이해 관계자들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시점으로 이 때는 예방을 위한 대응과 개입이 필요하다. 둘째 단계는 문제를 둘러싸고 이해 관계자들 사이에 자신의 입장과 이익을 지키기 위한 대립이 발생하고 갈등이 형성되는 시점으로 이 때에는 조기 해결을 위한 대응과 개입이 필요하다. 셋째 단계는 갈등 당사자들이 확정되고, 갈등 현안이 분명해지고, 갈등이 폭발하는 시점으로 이 때에는 갈등 형성에 기여한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함은 물론 갈등이 폭발하면서 당사자들 사이에 새롭게 발생한 문제들까지 포괄적으로 다루기 위한 대응과 개입이 필요하다.
한국사회에서는 어느 단계에서도 제대로 된 대응과 개입이 이뤄지지 않는다. 때문에 특정 문제가 드러나고 그것이 갈등으로 진화한 후에는 파괴적인 전개 과정을 거친다. 개인 사이에 발생하는 개인 갈등의 경우에는 갈등 현안과는 별도로 관계 유지가 가장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당사자들은 보통 간접적이고 비공격적인 방식으로 갈등에 대응한다. 반면 이 글에서 다루고 있는 사회 갈등의 경우는 갈등에 대한 당사자들의 대응이 개인 갈등에 대한 것과는 다르다. 사회 갈등의 현안들은 대부분 개인은 물론 그들이 속한 집단의 행복과 번영, 그리고 미래 세대의 안녕과 관련된 것들이다. 그러므로 당사자들은 갈등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자신의 입장과 이익을 지키기 위해 공격적인 태도를 취한다. 당사자들은 당장의 손실을 감수하더라도 모든 자원을 투자하고 때로 사회의 공식적, 비공식적 규범을 어기는 위험까지 무릅쓴다. 사회 갈등 당사자들의 이런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대응이 가져오는 결과는 결국 갈등의 파괴적 전개와 장기적인 교착상태다. 한국사회가 겪은 대부분의 사회 갈등이 이런 수순을 밟았고 그런 사회적 경험에 근거해 예방과 조기 대응이 이뤄지지 않은 갈등의 경우 전개 방식을 예상하는 것은 유감스럽게도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갈등의 방치와 파괴적 전개가 가져오는 결과는 갈등 당사자들에게는 치명적이고 사회 전체에도 무시할 수 없는 영향을 미친다. 가장 치명적인 것은 갈등의 파괴적 전개와 장기화로 인한 물질적인 손실과 정신적인 피해다. 또한 사회갈등이 다양한 집단들의 이익 및 필요와 관계되었다는 점에서 집단적 피해 또한 간과할 수 없다. 그중 가장 치명적이고 장기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 관계의 단절과 공동체의 파괴다. 갈등이 방치되는 동안 당사자들은 스스로 대립 국면을 만들고 관계를 단절시킨다. 상호 비방, 욕설, 왜곡, 그리고 물리적 충돌 등 갈등이 파괴적으로 전개되면서 당사자들은 자신들이 이제는 관계를 회복시킬 수 없는 단계에 도달했음을 인지한다. 특별히 한 공동체 안에서 특정 현안에 대한 찬.반을 두고 구성원들이 대립할 때 그 공동체는 결국 파괴되고 만다. 한탄강 댐 갈등, 부안 방폐장 갈등, 제주 해군기지 갈등 등 우리가 겪은 굵직한 사회 갈등이 모두 이런 수순을 밟았다.
갈등이 모든 인간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현상이라고 본다면 갈등을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는 공식적, 비공식적 기제의 계발도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런데 한국사회는 아직 그런 기제를 마련하지 못했고 여전히 갈등이 방치되고 파괴적으로 전개되는 상투적인 수순을 밟고 있다. 그것과 관련해서는 몇 가지 이유를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는 갈등이 한국사회가 당면한 주요 문제 중 하나로 자리 잡은 것이 지난 10여 년 동안에 이뤄진 일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지난 10여 년은 갈등을 경험하고 이해하는 학습 기간이었던 셈이다. 학습의 결과 한국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갈등이 중요한 사회 문제 중 하나라는 점에 동의하는 단계에 도달했다. 둘째는 새로운 갈등이 생겼기 때문이다.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변화는 다른 입장과 이익을 둘러싼 개인 및 집단 사이의 갈등을 야기했다. 세계관과 가치의 차이는 갈등을 야기하는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고 있다. 재산 보호, 삶의 질 향상, 부의 축적 등 행복과 번영의 기준 차이, 그리고 다른 삶의 방식도 갈등의 원인이 되고 있다. 셋째는 안정되지 않은 정치적 환경이다. 한국사회는 아직도 민주주의의 과도기를 겪고 있으며 때문에 사회갈등을 민주적인 참여 방식에 따라 해결하는 것에 대한 공공기관과 정치권의 이해가 지극히 미미하다. 갈등 자체에 대한 관심과 심각성의 인식, 그리고 효율적인 해결 기제 마련에 대한 관심과 책임감의 수준도 정권에 따라 기복이 심하다. 마지막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잘 드러나지 않지만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치는 요인으로 갈등에 대한 효율적인 대응과 건설적 전개를 독려할 수 있는 문화적 토대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특정 영역을 거론할 것 없이 한국사회 전체가 안고 있는 문제로 이런 문화적 토대의 부재 또는 허약함이 갈등의 방치와 파괴적 전개에 기여하고 있다.
갈등은 이유 없이 발생하지도 않고 모르는 사이에 사라지지도 않는다. 여러 가지 조건의 영향으로 갈등이 수면 아래로 잠복하거나 일정 기간 중단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을 갈등이 종식된 것으로 오해하고 방치하면 할수록 후에 더 복잡하고 추한 모습으로 재등장한다. 특별히 갈등 당사자 개인 및 집단의 운명과 번영, 존재 이유, 미래 세대의 행복 등이 관련된 문제라면 당사자들이 어떤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자신의 입장과 이익을 관철시킬 각오가 되어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갈등이 재형성될 수 있다.
2 입장 강화와 정치화
갈등은 갈등 현안에 대한 당사자들의 입장(position)과 갈등을 감수하고 얻으려는 이익(interest)이 다르기 때문에 생긴다. 갈등에 처한 개인 및 집단이 갈등 현안을 심각하게 인식하면 할수록 당사자들의 입장은 강화되고 그를 통해 얻으려는 이익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이 되며 시간이 갈수록 대립은 심화되고 극적인 방식으로 표출된다. 사람들 사이의 입장과 이익의 차이는 사실상 일상생활에서 쉽게 발견되는 것이고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그런 차이를 다루는 방법을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된다. 이것은 다르게 해석하면 입장과 이익 차이에 대한 갈등 당사자들의 대립 수준을 낮추고 효율적인 해결 방법을 찾는다면 갈등도 일상생활의 문제처럼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갈등해결’이라는 연구와 실천 영역이 주목하는 점도 이것이다.
정도에 차이가 있을 수는 있지만 입장은 대체적으로 갈등 당사자의 세계관, 도덕관, 정체성 등이 반영된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갈등 당사자들은 최선을 다해 자신의 입장을 보호하려 하고 때로 최악에 상황에 직면했을 때조차 타협하려 하지 않는다. 당사자들은 입장의 포기 또는 타협을 자신의 존재 이유에 대한 자기 거부로 이해하고 입장의 포기나 타협을 강요받는다면 그것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도전으로 해석한다. 이런 입장은 갈등 당사자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고 그런 입장의 차이 때문에 갈등이 발생한다. 한국사회의 갈등에서는 특별히 입장 강화가 두드러진다. 거기에는 두 가지 큰 이유가 있다. 첫째는 갈등 당사자들이 서로 상대의 입장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른 말로 상대의 세계관, 도덕관, 정체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이런 태도는 서로에게 도전과 공격이 된다. 둘째는 주로 입장에만 초점을 맞춰 갈등을 전개시키기 때문이다. 입장은 변하기 힘든 것이고 변한다 하더라도 스스로 인정할 수 있는 합리적인 해결책이 합의된 후에 수정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결코 타협할 수 없는 입장에만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결국 해결책에 대한 논의와 합의로 이동할 수 없는 결과를 낳는다. 갈등이 대립을 지나 해결 과정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입장의 상호 인정이라는 토대 위에서 현안에 대한 논의와 협상이 진행돼야 한다 (Jayne Seminare Docherty, Learning lessons from Waco: When the parties bring their gods to the negotiation table (Syracuse: Syracuse University Press, 2001), pp. 53-58 참조). 그러나 한국사회의 갈등은 입장에 초점을 맞추고 입장 강화를 통해 상대를 굴복시키려는 당사자들의 불가능한 목표 설정 때문에 대립과 정체를 반복하게 된다.
입장 강화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한국사회에서 갈등이 정치화되거나 당사자들이 갈등을 정치화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갈등의 정치화되는 이유는 한국사회가 이념 단절이 심하고 여전히 사회 문제를 이념 단절의 틀 안에서 접근하고 해석하려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많은 사회갈등이 시민단체와 공공기관과의 대립으로 전개되는 일이 빈번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 시민단체와 공공기관은 갈등 당사자 중 하나이다. 그러나 시민단체가 갈등에 관심을 가지고 개입하면 공공기관이 적극적으로 갈등에 대응하게 되고 결국 갈등은 시민단체와 공공기관의 대립으로 방향이 바뀐다. 시민단체와 공공기관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 이념적 성향 때문에 갈등은 불가피하게 정치화된다. 갈등의 정치화가 모두 부정적인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며 사회 갈등은 시민들의 정치 행위라는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갈등이 어느 정도 정치화 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국사회 갈등의 경우에는 시민단체와 공공기관이 주도하는 갈등의 정치화와 그에 따른 부정적 결과가 두르러지는 특징을 보인다. 갈등이 특정 당사자들에 의해 정치화되고 정치적 대립으로 전개되면 중요한 갈등 현안의 왜곡 및 소외, 다른 당사자들의 참여와 필요 외면, 대화 기회의 상실, 갈등의 조기 대응 및 해결 기회 상실 등의 부정적인 결과가 뒤따른다.
3 당사자 필요의 외면
갈등이 생기는 이유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고 당사자들이 그 문제를 덮어두지 않고 여러 가지 면에서 고비용을 요하는 갈등으로까지 전개시키는 이유는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다. 이것은 필요로 하는 것이 절실하다는 것을 의미하며 필요한 것을 얻기 전에는 갈등이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의미하기도 한다. 갈등연구에서 말하는 '필요(need)'는 갈등에 따라 안전, 인정, 자존감, 삶의 질 등 정체성과 관련된 것이기도 하고 땅, 일자리, 수입원 등 생존을 위한 수단인 경우도 있다. 갈등에 따라 당사자들의 필요는 다르지만 그것은 삶을 유지하고 향상시키기 위해 반드시 충족되어야 하는 것이고 동시에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사회의 갈등에서는 갈등에 처한 당사자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필요’가 간과되거나 언급될 수 있는 수준까지 갈등이 충분히 전개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당사자들이 입장 강화에 몰두하기 때문이고, 또 다른 면에서는 갈등의 모든 단계에서 소외되는 당사자가 생기기 때문이기도 하다.
당사자 필요의 외면은 갈등의 모든 단계에서 나타난다. 한국사회 갈등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공공갈등의 경우 정책의 계획 단계에서부터 정책의 영향을 받는 당사자들의 필요는 소외된다. 사실 공공갈등의 발생하고 증가하는 가장 큰 이유가 이해당사자들과 협의를 거치지 않는 공공기관의 일방적 정책 결정이다. 필요 또는 그것의 중요성을 당사자들에게 묻지 않고 공공기관이 일방적으로 추측하거나 무시하는 것이 갈등의 근본원인이 된다. 공공갈등이 아니더라도 많은 사회갈등이 특정 개인 및 집단의 일방적인 결정과 집행 때문에 발생한다. 갈등이 전개되는 과정에서도 상대적으로 영향력이 적은 당사자의 필요는 외면당하거나 다뤄야 할 현안으로 취급받지 못한다. 위에서 언급한 시민단체와 공공갈등의 대립이 가장 두드러진 예라고 할 수 있다. 두 영향력이 큰 당사자 집단의 대립이 격화되면 다른 당사자들은 두 당사자들의 그늘에 가려지게 되고 결국 그들의 필요도 갈등 전개 과정에서 소외된다. 갈등의 해결 과정에서도 입장과 이익에 주로 초점이 맞춰지고 근본적인 필요가 언급되지 않기 때문에 갈등은 봉합 수준에서 종식되고 당사자들은 결과에 만족하지 못하고 저항하게 된다.
당사자 필요의 외면은 갈등의 왜곡된 전개를 가져오고 갈등이 제대로 해결될 수 없는 환경을 만드는데 기여한다. 필요가 다뤄지지 않을 경우에는 갈등을 야기한 근본 문제에 대한 접근이 이뤄지지 않으므로 갈등은 해결이 아니라 표면적으로 종식된다. 필요한 것을 얻지 못한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막대한 에너지와 자원의 투자를 감수하면서 갈등을 전개했음에도 문제가 원상태로 복귀했음을 의미한다. 이런 경우 당사자가 결과에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비슷한 갈등이 재등장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결국 같은 문제에 근거한 갈등의 악순환이 생기는 것이다.
4 소통의 단절과 대화의 부재
갈등은 충돌하는 목표를 가진 당사자들이 대립하면서 발생한다. 갈등 당사자들은 다른 당사자가 자신의 목표 달성을 방해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대립하고 충돌의 강도가 심해지면 상호 적대감이 형성된다. 이런 상황에서 당사자들이 선택하는 것은 소통의 단절이다. 당사자들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상대와의 접촉이 아닌 단절을 택하고, 내부 결속을 다지기 위해 자신의 입장을 강화하며, 영향력 있는 외부 세력의 지지를 얻는데 주력한다. 이런 선택은 적대감을 강화시키고 소통 단절의 고착화에 기여하며 결국 해결을 모색하기 위한 대화의 부재로 이어진다.
대립과 적대감이 고조되는 갈등 상황에서 당사자들이 소통을 중단하고 대화를 거부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사자들 사이의 소통의 복원과 대화의 시도는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갈등의 해결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립하는 당사자들 사이의 소통 복원과 대화의 시도는 제삼자의 도움이 있을 때 더욱 용이해진다. 당사자들 사이의 대화와 갈등의 해결을 지원하는 사회적 기제가 갖춰진 사회에서는 당사자들이 제삼자의 도움을 요청하거나 제삼자가 당사자들에게 제안을 하는 방법을 통해 당사자들 사이의 직접적, 간접적 소통이 복원되고 대화가 시작된다.
한국사회 갈등의 경우 소통이 비교적 조기에 신속하게 단절되고 쉽게 복원되지 않으며 대화가 시도조차 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갈등 당사자들이 상호의존성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갈등 당사자들은 상충하는 목표 때문에 대립하지만 상대의 협조가 없이는 자신의 문제를 풀 수 없는 상호의존적인 관계에 있다. 갈등해결 연구가 실천과 관련해 가장 주목하고 강조하는 것은 이 부분이지만 갈등 당사자들은 통상 자신들의 ‘상호의존성’을 부인한다. 명분과 체면을 중요시하는 한국문화의 특성도 소통의 단절과 대화의 부재에 기여한다. 당사자들은 명분 없는 소통의 복원과 대화의 시도는 자신의 입장을 타협하는 것이라고 여긴다. 때문에 역시 명분과 체면을 중시하는 상대의 입장 수정, 양보, 대화 제의 등을 기대한다.
소통의 복원과 대화의 시도를 불가능하게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당사자들을 체계적으로 도와줄 전문 인력과 사회적 지원 시스템의 부재다. 갈등이 고조됨에 따라 감정적, 심리적, 신체적 한계에 이른 당사자들이 스스로 소통하고 대화를 모색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이와 같은 한계는 제삼자의 도움으로 극복할 수 있고 실제 갈등의 예방과 해결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사회 자원이 형성된 사회들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다. 그러나 한국사회에는 아직 당사자들이 자신들의 상호의존성을 인식하고, 소통의 복원과 대화를 통한 문제 해결을 시도하며, 전문적 지식과 조언을 통해 입장을 타협하지 않도록 지원하는 사회 자원이 형성돼 있지 않다.
III 해결의 모색
1 부정적 이해의 극복
사람들이 갈등을 불편하게 생각하고 외면하려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예측불가능성이라는 특징 때문이다. 갈등은 동일한 문제와 관련해 다른 인식, 감정적 대응, 문화적 배경, 삶의 경험 등을 가진 사람들이 대립하면서 형성되고 전개되며 어떤 한 당사자가 갈등을 전적으로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해 예측하는 것 또한 불가능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는 것을 애써 외면하고 때로 부인하려고 한다. 이에 더해 한국문화에서 갈등은 관계의 단절과 부조화를 의미하며 갈등 당사자는 관계와 조화를 깬 사람으로 여겨진다. 때문에 갈등 당사자는 관계와 조화를 깬 사람으로 비난받지 않기 위해 갈등을 외면하고 부인하려 한다. 또는 잘 드러나지 않는 우회적이고 간접적인 방법을 통해 갈등에 대응하려 한다 (정주진, 『갈등해결과 한국사회』 , pp. 35-63 참조). 갈등에 대한 이런 부정적 이해는 한국문화처럼 집단주의 문화의 성향이 강한 사회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David W. Augsburger, Conflict mediation across cultures: pathways and patterns (Louisville: John Knox Press, 1992), pp. 28-35.; Stella Ting-Toomey, "Toward a theory of conflict and culture," in William B. Gudykunst, Leah P. Stewart and Stella Ting-Toomey ed., Communication, culture, and organizational Process (New York: McGraw-Hill, 1985), pp. 71-86.; Diane LeResche, "Comparison of the American mediation process with a Korean-American harmony restoration process," Mediation Quarterly 9-4 (Summer 1992), pp. 323-339 참조).
사회 갈등의 경우에는 개인 갈등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위와 같은 특징에서 벗어난 방식으로 형성되고 전개된다. 사회 갈등은 대부분 집단의 입장, 이익, 필요와 관련돼 있으며 갈등 당사자들은 집단의 번영과 미래를 위한 것이라는 명분에 기대 적극적이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갈등에 대응하고 갈등을 전개시킨다. 동시에 사회 갈등의 대부분이 공공정책과 관련돼 있으므로 시민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때로 공격적인 방식을 택하기도 한다 (Jujin Chung, "A Transformative approach to public dispute resolution: a study of the US model and the South Korean case" (Ph.D. dissertation, University of Bradford, 2008), pp. 244-251 참조). 갈등을 인정하고 갈등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려는 당사자들의 태도와는 달리 사회 갈등의 경우 공공기관의 갈등 외면과 부인이 두드러진다. 공공기관은 사회적 비난을 피하고 작동하지 않는 제도적 문제점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 갈등을 부인한다. 공공기관이 갈등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당사자들의 대응을 사회 통합을 깨거나 공익을 외면하고 사익만을 추구하는 이기적이고 정당성을 벗어난 행동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갈등 자체를 부인하거나 당사자들의 필요를 외면하는 공공기관의 위와 같은 태도는 오히려 당사자들의 공격적인 대응을 부추기는 역할을 한다.
갈등에 대한 감성적 대응, 문화적 영향, 그리고 사회 갈등을 제대로 해결해본 경험이 없는 집단적 경험 때문에 갈등에 대한 한국사회 전체의 이해는 부정적이다. 그러나 갈등은 그 자체로는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갈등은 인간 사회의 다양한 관계 속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한다. 갈등은 개인 및 집단의 관계, 사회 환경과 구조, 결정 및 실행 방식에 문제가 있으며 개선되지 않을 경우 개인 및 집단 사이에 심각한 대립이 발생할 수 있음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갈등은 건설적으로 전개될 경우 관계, 구조, 결정 방식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된다. 그러나 당사자들이 대응 역량을 갖추지 못해 갈등이 파괴적으로 전개될 경우에는 문제가 있는 관계, 구조, 결정 방식이 유지되거나 최악의 경우 예전보다 후퇴하게 된다. 갈등의 건설적 또는 파괴적 전개는 당사자들이 어떤 대응 방식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결정되고 당사자들의 선택은 사회 환경과 구조가 당사자들을 어느 정도 지원할 수 있느냐에 따라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 갈등에 대한 부정적 이해는 갈등의 건설적 전개에 대한 경험이 적거나 없고 그와는 반대로 부정적 전개에 대한 경험이 많을 때 강화된다. 그러므로 한국사회의 개인 및 집단이 가지고 있는 갈등에 대한 부정적 이해는 감성적, 문화적 영향에 덧붙여 갈등의 파괴적 전개에 대한 경험이 많기 때문에 강화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갈등에 대한 부정적 이해의 극복은 한국사회 갈등의 해결을 모색함에 있어 선결 조건이 되어야 한다. 갈등이 인간 사회에서 불가피한 것이고, 한국사회에서 특별히 증가하고 있으며, 해결되지 않는 갈등이 삶의 질을 떨어뜨린다면 갈등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나아가 갈등을 긍정적인 변화의 동력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라도 우선적으로 갈등에 대한 부정적 이해를 극복할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갈등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고 대화와 협력을 통해 스스로 문제 해결을 모색할 수 있도록 개인 및 집단의 역량이 키워져야 한다. 갈등 당사자 필요에 답할 수 있도록 다양한 사회 조직, 특히 공공기관의 태도가 변하고, 소통 방식이 개선되며, 적극적 대응 역량이 계발돼야 한다. 개인 및 다양한 사회 집단 및 조직의 태도와 대응 역량의 변화는 교육과 훈련 프로그램, 대화 및 협력에 의한 해결 경험의 축적, 해결을 지원하는 인적, 물적 자원의 형성을 통해 이뤄질 수 있다.
2 당사자 중심의 갈등 해결
갈등해결 연구가 주장하는 가장 중요한 원칙은 당사자에 의한 갈등의 해결이다. 갈등해결 연구가 당사자들 사이의 대화와 협력을 통한 문제 해결을 주장하는 이유는 갈등이 당사자들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당사자들이 갈등에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당사자들이 합의하지 않으면 해결책이 정당성을 확보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나아가 당사자들의 합의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갈등이 종식될 경우에는 당사자들의 불만족으로 갈등이 재발하거나 새로운 갈등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좁은 의미에서 접근하면 ‘당사자(party)’는 갈등 현안의 직접적 영향을 받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갈등을 형성하고 전개시키며 해결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개인 및 집단을 말한다. 반면 넓은 의미의 접근을 취하면 당사자는 갈등을 야기한 현안, 그리고 진행되고 있는 갈등의 영향을 받는 모든 개인 및 집단을 말한다. 때로 갈등에 직접 관여하지도 않고 갈등의 영향을 즉각 받지도 않으며 다만 간접적으로 갈등 현안에 관여하거나 갈등의 영향을 받는 개인 및 집단을 ‘이해관계자’ ‘관련당사자’ 등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이들은 당장은 갈등에 관여하지 않지만 갈등의 전개 방향과 새로운 현안의 포함 여부에 따라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영향을 받을 수 개인 및 집단이다. 그러므로 굳이 분류하자면 ‘직접 당사자’와 ‘간접 당사자’로 분류할 수 있겠지만 특정 범위 안에서 갈등의 영향을 받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에 넓은 의미에서 모두 당사자에 속한다. 갈등해결 연구는 이들 모두에게 관심을 가지며 특별히 해결 과정을 계획하고 진행할 경우에는 이들 모두를 포함시키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앞서 언급한 갈등해결의 가장 중요한 원칙인 당사자 중심의 갈등해결은 그러므로 이들 모두를 포함시킨 과정을 말한다.
당사자 중심의 갈등해결 원칙은 갈등을 해결함에 있어 당연하게 적용돼야 하는 것이지만 특별히 한국사회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더욱 주목해야 하는 원칙이다. 이 원칙이 사회 갈등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전개시키고 해결하는데 있어 효율적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의 갈등은 흔히 상대적으로 힘이 큰 당사자 집단 사이의 대립으로 진화되고 정치화되며 미디어와 여론의 해석에 기대게 됨으로써 다른 당사자들의 관심과 필요가 소외되는 상황에 직면한다. 이런 상황이 되면 상대적으로 힘이 적은 당사자들은 상대적으로 힘이 큰 당사자들과 외부 영향에 의해 새롭게 형성된 프레임(frame) 안에서 자신들의 입장, 이익, 필요를 알리기 위해 고군분투하게 되고 결국 힘 있는 당사자들과 연합하고 그들의 프레임 안으로 진입하는 선택을 한다. 결국 일부 당사자들이 관심을 가지는 문제는 점점 주변으로 밀리고, 때로 갈등을 야기한 근본 문제까지 주변으로 밀리게 되며, 당사자 합의에 의한 갈등의 해결은 점점 요원해지게 된다. 당사자 중심의 갈등해결 원칙은 이런 왜곡된 갈등 전개를 예방하고 모든 당사자들이 최대한 평등한 힘의 관계 안에서 힘 있는 당사자들의 프레임 안에 귀속되지 않고 자신의 프레임을 유지하고 그 안에서 입장, 이익, 필요를 추구할 수 있게 해준다.
당사자 중심의 원칙은 힘에 의한 의제의 독점과 타협, 그리고 해결책 모색이 아닌 토론과 합의에 의한 문제의 진단과 점진적인 문제 해결을 가능하게 한다. 특정 당사자가 아닌 모든 당사자들의 입장, 이익, 필요를 동등한 수준으로 취급하고 반영하는 해결 과정은 공정성, 투명성, 공평성을 확보하게 해준다. 해결 과정에 참여하는 당사자들이 많아지면 과정이 복잡해지기 때문에 문제 해결이 더 어려워진다고 속단하기 쉽다. 그러나 비교적 동등한 힘을 가진 가장 영향력이 큰 소수의 당사자 집단들이 자신의 입장과 이익을 둘러싸고 대립할 경우 문제가 특정 단계에서 정체상태에 빠지게 될 경우가 더 많다. 상대적으로 영향력이 적은 집단들이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참여하고 목소리를 낼 경우 영향력 큰 당사자들 사이의 대립과 정체상태를 희석시킬 가능성이 더 커진다. 나아가 문제를 다른 방향에서 접근하고 힘과 영향력이 큰 당사자들이 아니라 모두가 관심을 가질 수 있는 방향으로 과정을 만들 가능성도 커진다. 무엇보다 갈등해결 과정이 반드시 담보해야 하는 공정성, 투명성, 공평성을 확보하게 해준다.
당사자 중심의 원칙은 가장 민주적인 방식에 의한 문제 해결을 가능하게 한다. 갈등해결 연구는 대의 민주주의가 갖는 비효율성과 시민이 배제된 의사결정 과정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한 실질적인 해결책이다. 많은 갈등해결 연구와 실천이 당사자가 배제된 정책 결정과 실행에 대한 비판과 개선 모색이라는 고민에서 시작됐다. 갈등해결이 실행되고 있는 사회들에서 당사자가 중심이 되는 갈등해결 원칙이 환영받는 이유 또한 공공기관의 일방적 정책 결정과 시민 배제에 실망한 시민들이 공공기관에 대한 도전은 물론 시민 권리의 회복 수단으로 갈등해결 과정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연구들이 갈등 당사자들이 직접 자신의 문제를 토론하고 해결책에 합의하는 갈등해결 과정이 참여 민주주의에 대한 시민들의 만족도를 높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당사자 중심의 문제 해결 방식은 공공기관과 시민단체 같은 상대적으로 영향력이 큰 집단 중심의 정책 토론과 합의가 아닌 일반 시민들의 다양한 관심과 필요가 반영된 정책 결정을 가능하게 한다. 또한 시민들의 필요에 응하는 공공기관을 만들고 시민들과의 대화와 협력을 통해 공공정책의 질 또한 향상시키는 효과를 낳고 있다 (Thomas C. Beierle and Jerry Cayford, Democracy in practice: public participation in environmental decisions (Washington, D. C.: Resources for the Future, 2002).; Frank E. Dukes, Resolving public conflict: transforming community and governance (Manchester: Manchester University Press, 1996) 참조).
3 사회 환경의 변화
한국사회 갈등이 증가하고 해결되지 않는 근본적인 이유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전체적인 사회 환경이 갈등의 발생과 전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만 갈등의 예방과 해결에는 긍정적인 기여를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사회 환경이 변하지 않으면 갈등은 계속 증가하고 축적될 것이다. 그 결과 전체 사회는 물론 개인이 받는 스트레스는 증가하고 삶의 질은 낮아질 것이다. 갈등의 효율적인 예방과 해결은 그러므로 한국사회가 불가피하게 다뤄야 할 가장 중요한 현안 중의 하나이며 적극적이고 전략적인 대응이 없이 시간이 자연스럽게 해결해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갈등이 발생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당사자들에게 ‘대화’와 ‘양보’를 통해 문제를 해결할 것을 주문한다. 갈등에 직면한 당사자들은 이성적으로 ‘대화’와 ‘양보’의 미덕을 이해하지만 감정적 대립 때문에 스스로 대화를 시작하기 힘들고 상대의 대응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우선적 양보를 고려할 수가 없다. 또한 명분이 없이 입장과 감정의 대립으로 단절된 소통의 회복을 시도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당사자들 사이의 소통 복원, 대화 개시, 협력적 작업 등을 체계적이고 세밀하게 지원할 수 있는 전문적 제삼자가 필요하다. 제삼자의 존재는 당사자들에게 소통 복원을 위한 명분을 제공하는 역할을 하고 당사자들을 접촉해 해결 가능성을 모색함으로써 대립의 중단과 갈등의 방향 전환에 기여한다. 또한 전문가로서 갈등의 분석, 당사자 및 현안 파악, 가능한 대화 및 협력 작업의 계획, 협상 및 합의 과정의 실행 등 문제 해결을 위한 실질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전문적 제삼자의 존재는 갈등의 예방과 해결을 돕는 사회 자원으로써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갈등에 비교적 잘 대응하고 있는 사회의 경우 전문적 제삼자 역할을 하는 개인 및 단체가 오래 전부터 존재해왔고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갈등을 예방하고 해결하는데 중요한 핵심 역할을 해왔다. 전문적 교육과 훈련을 받고 경험을 쌓은 개인, 비영리단체, 대학부설기관 등이 전문적 제삼자로써 갈등 당사자들의 필요에 답하고, 해결을 위한 과정을 계획하고 실행하며, 공공기관과 시민 역량 향상 교육을 하는 등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한국사회에도 소수지만 전문적 지식과 기술을 갖춘 개인과 단체가 있지만 새로운 방식의 갈등 해결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낮고 실천의 부족으로 충분히 사례 개발이 되어 있지 않아 거의 활용되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도 대화가 아닌 대립에 의한 문제 접근에 익숙한 사회와 갈등 당사자들의 태도 때문에 새로운 방식의 고려 또는 시도 자체가 이뤄지지 않는 상황이다. 그러므로 한국사회 갈등의 해결을 위해서는 사회 차원에서 전문적 제삼자 역할을 할 수 있는 사회 자원 형성을 지원하고 동시에 적극 활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갈등 예방과 해결을 위한 새로운 접근을 제도화하는 것에 주력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는 것이 사실이고 일부 공공기관과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그런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제도화가 이뤄진다면 새로운 방식을 통한 갈등의 예방과 해결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자발적 참여’와 ‘당사자 합의’라는 갈등해결의 원칙 때문에 제도화는 새로운 접근과 전문적 제삼자의 활용을 권고하는 역할을 할뿐 활용 자체를 확산시키는 역할을 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제도화는 문제 해결 방식의 선택을 넓혀주는 역할은 하겠지만 갈등에 대응하는 공공기관, 시민단체, 시민들의 태도가 바뀌지 않는다면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할 가능성이 더 크다. 당사자들의 대화와 협력에 기초한 ‘갈등해결’이라는 새로운 방식을 통해 갈등이 해결될 수 있으려면 모든 당사자 참여와 대화 과정을 통한 문제해결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돼야 하고 과정에 대한 이해가 확산돼야 한다. 공감대의 형성과 이해의 확산은 공공기관, 시민단체, 시민 등 다양한 사회 구성원들에 대한 교육을 통해 이뤄질 수 있다. 교육을 통해 새로운 갈등해결 방식으로의 변화가 선택이 아니라 성숙된 민주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존중하며 공공기관의 공공 서비스 질을 높이고 시민단체의 감시 및 대시민 서비스 역할의 강화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다. 나아가 새로운 방식의 활용과 갈등의 건설적 대응 및 해결에 실질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
위의 글은 2012년 5월 17일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소가 주최한 <한반도 비평화 구조와 분단: 이론과 실제>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발제문입니다. 무단 복사 및 배포할 수 없고 인용할 경우엔 반드시 출처와 저자를 밝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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