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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 함부로 말하지 마라평화갈등 이야기 /평화 2017. 3. 11. 11:24
불편한 통합 담론
헌재의 탄핵 심판 선고가 내려지자 정치권, 언론, 종교계 등이 일제히 '통합'을 얘기하고 있다. 그동안 탄핵을 찬성했든 반대했든 상관없이 헌재의 선고를 받아들이고 이제 갈라진 사회를 통합해 안정시켜야 한다는 얘기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화해와 화합을 주장하기도 한다. 언뜻 들으면 바람직하고 당연한 말처럼 들린다. 그런데 통합이란 말을 듣고 있자니 자꾸 구시대 정치가 떠오른다. 국가안보나 사회안정을 빌미로 잘못된 정치와 사회문제에 대한 저항과 문제 제기를 억압했던 그런 정치 말이다. 물론 현재 상황은 다르니 내 속이 좀 꼬였을 수도 있다. 그런데 백번 양보하더라도 지금은 기계적으로 통합을 얘기할 때는 아니다.
'통합'을 제일 강하게 얘기하는 것은 정치권이고 거기에는 당연히 이제 대선 구도로 상황을 바꾸려는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다. 조기대선이 코앞에 닥쳤으니 그럴 필요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탄핵 선고 직후 나온 '통합'은 듣기에 아주 불편하다. 거기에는 탄핵 인용을 찬성했고 결국 '승리'한 사람들에게 탄핵 기각을 주장했고 결국 '패배'한 사람들을 보듬어 주고 '관용'을 베풀어줄 것을 요구하는 교묘한 압박이 숨어 있다. 나아가 탄핵 선고를 이끌어내기 위해 촛불을 들었고 꾸준히 지지 의사를 표명했던 대다수의 국민들과, 탄핵에 반대하면서 온갖 음모와 폭력을 자행했던 소수의 국민들을 똑 같이 취급하는 뉘앙스가 숨어 있다. 황교안 대행은 헌재 선고를 받아들여야 한다면서 "갈등과 대립을 마무리할 때"라고 노골적으로 말하기도 했다. 그 말에는 촛불을 들고 법치주의를 지키기 위해 분을 삭이며 인내했던 사람들과 태극기를 들고 거짓주장과 폭력 선동을 일삼았던 박사모 사람들을 대립상황을 만들고 그 결과 사회통합을 해친 사람들로 싸잡아 비난하는 속내가 숨어 있는 것 같다. 그의 지난 행태를 곱씹어보면 말이다. 그래서 아주 불편하다. 옳음과 그름, 법치주의 존중과 법치주의 거부라는 분명한 차이를 언급하지도 인정하지도 않고 '통합'이란 말로 모두 한 솥에 넣어 버무리려고 하니 말이다.
법치와 사법정의 먼저
헌재의 탄핵 선고가 이뤄진 직후 모두 "촛불이 승리했다"고 말했지만 사실 탄핵 인용은 법치주의와 사법정의 확인의 시작에 불과하다. 사실 탄핵 인용을 지지했던 대다수의 국민들은 촛불집회가 끝나도 고난과 인내의 길을 걸어야 한다. 박근혜와 최순실, 공범자인 재벌 총수들, 그리고 그들에게 협조하고 콩고물을 먹었던 많은 사람들에 대한 사법처리 과정에서 또 다시 얼마나 많은 몰상식과 억지 주장이 난무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상황에 비춰보면 말이다. 또한 그동안 박근혜를 비호했던 자유당과 소속 의원들이 대선에서 그간의 과정을 폄하하고 부정하는 역공을 취하면서 국민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을 가능성도 남아 있다. 무엇보다 지난 몇 달 동안 박근혜를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모든 사법절차를 부정하고, 가짜뉴스로 사람들을 선동하고, 조폭처럼 물리적 폭력을 휘둘렀던 사람들이 당분간 같은 일을 반복할 가능성도 있다. 물론 그들이 지금까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자유당 정치인들의 선동 및 협력과 경찰의 방치 및 '관용' 덕분이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먼저 얘기해야 하는 것은 법치와 사법정의다. 사실 난 정치권에 이런 메시지를 기대했었다. 모두 알고 있듯이 박근혜를 심판한 것 하나로 법치와 사법정의가 회복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기엔 너무 많이 망가졌다. 무엇보다 당장 박사모 주도자들에 대한 철저한 법적용이 시급하다. 적어도 그런 후에 '통합'을 얘기해야 한다. '통합'이란 말은 민주사회에 그리 어울리는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현재 그 말을 사용하는 많은 사람들이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바로 박근혜와 한 편이었던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통합'이다. 그것은 구시대 정치가 했던 것처럼 국가안보와 사회안정을 위해 최소한의 사법정의조차 제대로 실행하지 않겠다는 말처럼 들린다. 그래서 위험하기까지 하다.
탄핵 기각을 주장했 사람들, 그리고 정치인들은 수십년 세월 동안 기득권을 누렸던 사람들이다. '진보 성향' 정권이 있었던 10년을 제외하고 말이다. 사실은 그때도 약간의 상실감은 존재했지만 그들의 기득권은 그대로 유지됐다. 그런 그들에게 박근혜의 몰락은 보수의 몰락이고 기득권의 상실이다. 그래서 박근혜 탄핵이 마치 사형선고나 되는 것처럼 호들갑을 떨고 있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직면한 패배의 슬픔과 절망감을 이해해야 한다고, 그리고 '관용'으로 보듬어줘야 한다고 감정적 호소를 하고 있다. 그런데 말이다. 지난 수십년 동안 억압 받고 부당한 패배와 절망을 맛보며 살았던 사람들에게 이번 탄핵 인용은 한 줄기 빛일 뿐이다. 그것은 비로소 이 땅에 법치와 최소한의 사법정의가 실현될 가능성을 보여주는 작은 희망일 뿐이다. 그런데 어줍잖은 통합으로 그것마저 포기하라고? 더군다나 법치와 사법정의의 실현이 완전히 담보되지 않은 불안한 상황에서? 그건 너무 가혹하다. 보다 근본적으로 정의를 약속하지 않고 피해자에게 통합 요구를 들이미는 것은 도덕적으로 정치적으로 부당하다. 그러니 정치권은 기계적이고 의도적으로 통합 나부랭이 얘기하지 말고 법치와 사법정의를 먼저 얘기해야 한다. 그래야 앞으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관련된 모든 사람들의 사법처리를 제대로 할 수 있다. 그리고 당장 법치주의를 부정하고 물리적 폭력과 가짜뉴스로 위법을 일삼았던 박사모 주도자들을 법적으로 처리할 수 있다. 그래야 정치인들이 정말 원하는 안정과 조기대선 모드로 분위기 전환도 할 수 있다. 통합, 함부로 말하지 마라. 너무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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