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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스 속의 세월호 한과 분노평화갈등 이야기 /평화 2014. 7. 15. 00:00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이 단식에 들어갔다. 다른 한편으론 350만 명 이상이 서명한 용지가 담긴 415개의 박스가 국회에 전달됐다. 모두 세월호 조사를 위해 특별법을 제정해달라는 호소다. 4월 16일 사고가 일어난지 이제 꽉 찬 세 달이 지났다. 4월에는 한 사람이라도 살아 돌아올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고, 5월에는 비극적인 사고를 계기로 앞으로는 비슷한 사고로 억울한 희생자가 생기지 않는 조금 나은 대한민국이 될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다. 그렇지만 6월엔 예전처럼 그 기대도 물거품이 될 것이라는 불안함 속에 그래도 한 줄기 희망을 놓치고 싶지 않은 몸부림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7월, 한 줄기 희망은 말 그대로 한 줄기 희망이 됐고, 세월호 사고와 후속 조사 및 정책은 점점 소수의 관심사로 밀려나고 있다. 그중 가장 속이 뒤틀리는 일은 그 남은 사람들 중에서도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가장 앞장서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이니 꾹꾹 눌러 놓았던 욕이 목구멍 끝까지 올라와 알짱거리는 것을 느끼게 된다.
희생자 가족들의 단식과 박스에 담긴 350만 명의 서명은 현재의 상황을 가장 단적으로 설명해준다. 겉으로 보면 국정조사가 진행되고 있고 검찰도 열심히 수사를 하고 있다. 그런데 속을 들여다보면 지지부진, 진정성과 효율성 부재, 정치적 계산 우선의 상황이다. 무엇보다 당사자인 희생자 가족들이 상황을 그렇게 보고 있다는 것이 가장 주목해야할 부분이다. 그동안 희생자들을 제대로 떠나보낼 마음의 여유도 가져보지 못한 사람들이 이제는 단식까지 하게 된 이유가 그것이다. 국민들은 또 어떤가. 제발 제대로 된 조사와 수사를 해달라고 행정부와 정치권의 발목을 잡고 늘어지나다 촛불집회, 항의시위, 서명운동까지 해야 했으니 다이내믹한 대한민국에서는 하루도 편히 지낼 수가 없다. 더 기막한 것은 청와대, 국회, 행정기관, 검찰, 경찰 등은 세월호와 관련된 일을 근무시간에 월급 받으면서 하지만 그들의 부족과 잘못을 바로잡는 일을 하는 희생자 가족들과 국민들은 모두 제 돈 써가며 발로 뛰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금으로 급료 받는 사람들은 세금 내는 사람들의 필요를 외면하고, 결국 세금 내는 사람들이 '목말라 우물 파는' 심정으로 나서야 하니 이게 무슨 거꾸로 가는 사회인지 모르겠다.
이 모든 정치 상황은 대의 민주주의에 기반하고 있다. 신뢰할 수 없고 욕을 부르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대의 민주주의의 범위 안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특별법을 제정해 달라고 단식을 하고, 국회에 서명지를 전달하고, 진상조사위원회에 수사권을 부여해 달라고 요구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이 행정부, 입법부의 결정과 법적 토대가 없으면 실행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속을 뒤집을 정도로 지나치게 스마트하고 계산적인 관료들과 정치인들은 이런 한계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십분 활용하는 것이 생활화돼 있다. 선거를 통해 자신을 지지해주고 권한을 부여해 준 사람들에 대한 배려 따위는 그 계산의 우선 순위에서 밀려나곤 한다. 그러니 선거철만 지나면 사람들은 항상 그들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져야 하는 우스운 꼴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 한계를 극복할 길이 없는 것도 아닌데 관료들과 정치인들은 항상 그 한계를 '절대적 한계'라고 얘기하며 기득권 사수를 위해 한계를 뛰어넘고 싶어하지 않는다. 뼈 속까지 꽉 들어찬 욕심과 오만 때문이다.
대의 민주주의는 지극히 평범하고 보편적인 민주주의 제도지만 그것의 가장 큰 한계는 민주주의가 일정 수준 이상 성숙되지 않은 사회에서는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국민들로부터 권한과 책임을 부여받은 관료들과 정치인들이 양심과 도덕성에 기반해 책임과 능력을 발휘해야 하는 것이 기본 '계약'이지만 그것은 지극히 상식적이고 일정 수준 이상의 도덕성과 책임감을 지닌 관료와 정치인에게나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성숙되지 않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선거철만 빼고 허점을 무한 방출하게 되는 대의 민주주의를 보완하기 위해 실행되는 것이 바로 시민들의 참여다. 시민 참여는 자신의 이익에 따라 갈대처럼 마음이 변하는 관료들과 정치인들을 견제하고, 그들이 선거철의 초심을 기억하도록 압박하며, 책임 회피를 위해 권한을 남용하지 않도록 감시하는 역할을 한다. 무엇보다 시민 참여는 대의 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는 열쇠가 된다. 한을 품은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이 단식으로 요구하고 있는 것, 그리고 415 박스에 담긴 350만 명의 분노가 요구하고 있는 것이 바로 참여다. 특별법에 사람들의 분노와 한을 반영하고, 희생자 가족들과 국민들이 함께 진상을 조사하며, 국민들의 필요와 요구를 모아 향후 정책에 반영될 수 있도록 참여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의 과정들이 당사자들과 다수 국민들의 필요와 요구를 반영하지 못한데서 나온 이런 참여의 요구조차 관료들과 정치인들의 판단과 결정에 기대야 하니 참 얄궂은 일이다.
한때 모 정당을 대변했던 노란색은 세월호 사고 이후 새로운 의미가 됐다. 그것은 기다림과 희망이었다가 기억과 참회가 됐고 다시 분노와 책임이 됐다. 그리고 선명한 노란색의 중심에는 '사람'이 자리 잡았다. 이웃의 희생을 외면하지 않는 사람, 정치와 사회의 폭력에 의해 희생당하지 않는 사람, 불의를 외면하지 않는 사람, 희망을 나누는 사람, 아픔을 나누는 사람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침묵을 강요받는 현실에서도 침묵하지 않고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다. 어떤 사람들은 정치적이라 하고, 어떤 사람들은 질기다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이제 좀 잊어버리자고 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그렇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소수의 의견이라도 무시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물며 희생자 가족들이 직접 나서고, 350만 명이 자발적으로 서명까지 했는데 그것을 무시하는 것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특별히 박스 속에 담긴 한과 분노를 생각한다면 더욱 그렇다. 그 한과 분노를 똑바로 보고 그것을 껴안는 것이 치명적이 되버린 대의 민주주의의 한계를 조금이나마 극복하는 길이다. 나아가 시시때때로 이곳저곳에서 희생자를 만들어내는 대한민국의 정치, 사회 폭력을 조금이나마 줄여나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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