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치와 평화평화갈등 이야기 /평화 2014. 6. 9. 00:00
지방선거가 끝났다. 투표는 열심히 했지만 선거로 세상이 변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열심히 투표를 하는 이유는 작은 변화가 쌓이면 큰 변화의 에너지가 되고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일 것이다. 나에게 좋은 세상은 평화로운 세상이다. 그런데 선거가, 그리고 정치가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는데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기나 하는 것일까? 아니 보다 근원적으로 정치가 평화와 눈꼽만큼의 관계나 있는 것일까?
평화는 지나치게 이상적이고, 그래서 지나치게 현실적인 정치와는 말과 뜻을 섞는 것조차 거의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평화는 가치지향적이고, 윤리적이며, 심지어 비현실적인 이상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것이므로 현실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현실적인 현안과 해결책을 모색하는 정치하고는 어울릴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뚤어진 정치에 딴지를 걸어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생각은 순진한 이상주의자의 상상에 불과하며, 설사 딴지를 건다해도 그것은 상징적인 일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실현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가장 이상적인 기준을 한번 던져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치는 정말 평화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일까? 아니 보다 근본적으로 아무 상관이 없어도 되는 것일까? 평화는 정치와 현실적으로 조우할 수 없는 것일까?
연구자들이 평화를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전쟁 때문이었다. 20세기 초반 선도적인 연구자들은 불가피한 정치적 선택으로 정당화되던 전쟁의 피해를 막을 현실적인 방법을 고민하기 위해 평화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전쟁에서의 인간 희생과 세상 파괴를 정당화하는 정치에 도전하기 위한 화두이자 가치 및 개념으로 평화를 연구하고 점차 현실적인 담론을 형성했다. 그후 연구자들은 폭력의 가장 극단적인 예인 전쟁뿐만 아니라 인간 삶을 황폐화시키는 사회의 온갖 폭력을 평화를 해치는 것으로 규정했다. 특별히 비뚤어진 정치가 야기하고 조장하는 사회의 구조적 폭력 때문에 개인과 사회 차원에서 평화가 파괴된다고 정의했다. 평화는 전쟁을 포함한 여러 사회 폭력을 제거해야만 성취될 수 있는 것이고 그 폭력의 근저에는 다수가 원하는 평화로운 세상을 소수의 이익을 위해 외면하는 잘못된 정치가 가장 크게 자리잡고 있다고 결론지었던 것이다.
지금도 평화 연구는 소수의 이익을 위해 다수의 이익과 참여를 배제시키고, 사회 구조의 형성과 관리를 악용하며, 그런 이유로 발생한 폭력과 피해를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정치적 선택과 행위를 집중적으로 분석, 감시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때문에 평화를 연구한다는 것은 정치적일 수밖에 없고, 평화는 기득권층이 정치적 힘을 이용해 통제하고 관리하는 세상에 항상 딴지를 걸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누군가 평화는 '모두 좋은 게 좋은 것'을 말하는 것이고, 불의한 일까지 정의를 묻지 않고 덮어주며, 정치가 만든 문제같은 것에는 무관심하고, 어떤 경우에든 서로를 포용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라는 근거 없는 주장을 한다면 그것은 지독한 무지와 아집에서 나온 것이다. 평화는 오히려 '모두 좋은 게 좋은 것'이 아니라 누가 폭력을 만들었고 희생자가 누구인지 두 눈 부릅뜨고 밝혀내고, 불의한 것에는 반드시 누가 어떻게 잘못했는지 정의를 물으며, 정치가 만든 폭력적 사회 구조에 항상 민감하게 대응하는 것을 말한다. 평화는 궁극적으로 모두를 포용하고 평화로운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목표지만 그것은 반드시 잘못을 따지고 법 또는 공동체의 판단에 따라 정의의 대가를 치르게한 후에 이뤄진다.
언젠가 세계 평화 현안에 대해 발제를 했는데 참가자 중 한명이 나한테 너무 정치적인 현안만 얘기하는 것 아니냐고 문제를 제기했다. '평화학 박사, 평화학자, 평화교육자'등의 꼬리표를 단 내가 말랑말랑한 평화가 아닌 '살벌한' 정치적 문제만을 지적해 마음이 불편했던 모양이다. 그 사람 또한 평화, 또는 평화를 연구하고 고민한다는 것이 세상의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잘못된 일까지 태평양처럼 넓은 마음으로 수용하고 껴안는 것이라고 착각했던 것 같다. 평화를 연구하고 논하는 사람들이 숙명적으로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말이다.
정치는 평화의 목표는 아니지만 평화를 성취하기 위한 합리적, 보편적 수단이자 과정으로 여겨진다. 그러므로 정치는 평화에 관심이 없을 수 있지만 평화는 정치에 관심이 없을 수 없다. 정치의 목표가 평화인 경우는 드물지만 시민의 안전과 행복을 목표로 하는 정치라면 적어도 평화가 목표로 하는 것과 대립적일 수는 없다. 그리고 평화에 기여하는 최소한의 정치적 과정은 참여를 보장하는 선거다.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는데 있어서 올바른 정치는 최소한의 조건이 되고 선거는 그 조건을 충족시키는 정치적 과정 중 하나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제대로 된 정치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는데 반드시 필요하고, 때문에 평화는 정치에 딴지를 걸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평화갈등 이야기 > 평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관심병사에 대한 폭력적 관심 (0) 2014.07.05 남자의 군대, 군대의 남자 (0) 2014.06.25 세련된 분노, '미개한' 분노? (0) 2014.05.26 의리의 대한민국? (0) 2014.05.20 손석희의 뉴스, 지상파의 뉴스 (0) 2014.0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