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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련된 분노, '미개한' 분노?평화갈등 이야기 /평화 2014. 5. 26. 00:00
세월호 침몰 사고 후 한 달하고도 10일이 지났지만 분노는 계속되고 있다. 세월호 사고가 내내 사회 중심 이슈가 되고 여론이 한 쪽으로 쏠리고 있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심심찮게 딴지를 걸고 있기 때문이다. 그중 지금까지 가장 최악이었던 것은 참담한 심정인 사망자와 실종자 가족들의 가슴을 제대로 후벼판 한 청년의 '미개' 운운 발언이었다. 그런데 며칠 전 누군가 그 말을 재탕한 일이 알려졌다. 그 주인공이 '철 없는' 젊은이가 아니라 이름을 대면 알만한 유명한 목사라는 점 때문에 사람들은 더 충격을 받았다. 그 목사의 말도 4월 말에 나온 것이긴 하지만 어쨌든 상처가 아직 생생한 사망자 및 실종자 가족들과 다수 국민들의 가슴을 다시 후벼판 것은 마찬가지다. 재탕 사건까지 접하고보니 절박한 사람들의 분노를 '미개한' 감정 표출로 폄하하고 '세련된' 분노를 강요하는 것이 단순한 개인의 '취향'이 아니라 대한민국에서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이 공유하는 생각이라는 의심이 든다. 그리고 그들이 '세련됨과 교양'을 갖춘 자신들은 노골적인 방식으로 분노를 표출하는 사람들과는 다르다고 애써 항변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21세기의 2014년에 OECD 회원국이고, 세계 선진국 클럽 문턱에 바짝 다가가 있는 대한민국에서 '미개'라는 말이 등장했다는 것은 정말 화내다 어이가 없어 웃음을 내뿜을만한 일이다. '미개'는 사전적으로 '개화되지 않고 문명이 발달하지 못한 것'을 의미하는 말로 몇백 년전 서양인들이 북미, 남미, 아프리카, 아시아의 사람들을 보면서 내뱉던 말을 연상시킨다. 최초의 사용자가 왜 굳이 그 단어를 선택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맥락을 보면 그말을 사용하고 두둔한 사람들은 실종자 가족들이 북미나 서유럽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직설적으로 분노를 표출하기보다 적절한 절차를 밟고 세련된 방식으로 문제를 제기하길 기대했던 것 같다. 물론 그 이면에는 정부 고위 관료에 대한 애틋한 '존경심'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세상 경험이 부족해서인지 지식이 얕아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들이 간과한 것이 있었으니 하나는 사람들이 분노를 표출하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직설적인 분노의 표출은 약한 자의 최후 저항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개인, 문화, 사회, 정치 등 여러 가지 요인에 따라 분노를 표출하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대체적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문제에 직면했을 때 쉽게 분노를 폭발시키지 않는 편이다. 본능적으로 자신이 어떤 행동을 취할 때 자신만이 아니라 관계돼 있는 사람들에게 미칠 영향, 상대의 감정을 상하게 할 경우 향후 불이익을 받을 가능성, 체면이 손상될 가능성, 자신을 부정적으로 평가할 주변의 시선 등을 고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억울한 일에 직면했을 때조차 한계에 달할 때까지 분노를 삭이는 경우가 많다. 이런 방식의 분노 관리와 표출은 기본적으로 개인의 성향에 따라 다르지만 체면, 관계, 힘, 집단의 영향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는 한국 문화와 사회의 영향을 받는 측면도 크다. 또한 정치적으로 쉽게 분노를 표출시킬 수 없는 상황에서 살아 왔고 현재도 그런 환경이 어느 정도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분노의 표출에 여러 가지가 영향을 미치지만 특별히 약자의 분노 표출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은 힘의 차이다. 약자가 분노를 삭이는 이유는 자기보다 힘있는 상대에게 저항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대가족, 회사, 조직 내에서 분노를 삭이는 사람들은 모두 상대적으로 약한 사람들이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화병'을 가지고 산다. 그런데 그들이 분노를 폭발시키는 시점이 있다. 바로 한계에 달했을 때다. 그리고 그 분노는 아주 직설적이고 '세련되지 못한' 형태로 폭발되는 경향이 있다. 힘이 약한 사람이 상대에게 충격을 주고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용기와 에너지를 쥐어짜기 때문이다. 세련된 언어와 행동으로 상대를 떠보기보다 실패와 불이익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최대의 효과를 낼 수 있는 방법을 택하는 것이다. 결국 직설적이고 충격적 방식의 분노 표출은 약자의 최후의 선택이자 저항이 되곤 한다.
약자가 '세련되지 못한' 분노 표출 방식을 선택해야 하는 이유는 분노를 '세련되게' 표출하고 억울함을 호소할 정당한 구조와 절차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를 제기하고, 요청을 전달하며, 해결책을 같이 논의할 수 있는 공식적인 구조와 절차가 마련돼 있다면 사람들이 체면 손상과 주변의 부정적 평가를 감수하면서까지 굳이 직설적으로 분노를 표출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정당한 구조와 절차를 찾을 수 없으니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해 직설적 방법을 택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쌓였던 분노가 폭발하는 것이다. 이런 일은 우리사회의 갈등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는 일이다. 갈등에 직면한 사람들이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책을 같이 찾을 수 있는 통로가 보장된다면 사람들은 힘들게 거리로 나와 '제발 얘기를 들어달라'고 외치는 것보다 당연히 편안한 실내에서 폼나게 앉아 '대화'하길 원할 것이다. 그렇지만 불행하게도 우리사회는 여전히 약자가 축적된 분노를 폭발시켜야만 누군가 돌아보는 한 없이 좁고 얕은 구조와 절차를 유지하고 있다.
'미개'라는 화석 언어를 끌어내 '유행어'로 등극시킨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하고 의젓하게 앉아서 대화를 통해 문제를 논의하고 해결하는 것인 것 같다. 물론 나처럼 갈등해결을 전공한 사람도 갈등을 해결할 때는 대화가 기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우선 조건이 있다. 누군가 억울한 사람이 있다면 상호 공유를 통해 그 억울함을 풀어야 하고 분노가 있다면 표출시켜 먼저 마음의 찌꺼기를 비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억울함과 분노를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은 곧 서로 상대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됐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 후에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과정이 진행될 수 있다. 그런데 억울함과 분노가 가득 찬 사람들에게 그것을 억누르라고 요구하는 것은 또 다른 억압이고 새로운 문제를 발생시키는 일이다. 더군다나 용기와 에너지를 쥐어짜면서 분노할 필요도 없는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이 그런 얘기를 한다는 것은 세상을 잘 모르면서 아는체 허세를 떨고, 다른 사람들의 분노를 폄하하는 빈정거림으로 밖에 볼 수 없다. 유감스럽게도 현재로선 그들이 원하는 방식의 냉정하고 세련된 문제 제기 모습을 대한민국 하늘 아래에서 쉽게 찾아보긴 힘들 것 같다. 정말 '세련된' 방식으로 분노를 표출할 수 있는 구조와 절차가 마련되지 않는한 그들이 말하는 '미개한' 분노는 사회 곳곳에서 계속 터져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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