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석희의 뉴스, 지상파의 뉴스평화갈등 이야기 /평화 2014. 5. 12. 00:00
세월호 침몰이 있은 이후 사람들의 눈은 일제히 뉴스로 향했다. 모두가 현장에 갈 수 없는 상황에서 뉴스는 유일하게 현장과 현장 밖 사람들을 연결해주는 통로가 됐다. 그로부터 시작된 뉴스의 홍수 속에서 가장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은 '손석희의 뉴스'다. 손석희 앵커가 진행하는 뉴스는 종편 채널 JTBC의 'NEWS 9'이지만 사실 그 뉴스는 JTBC의 뉴스라기보다 '손석희의 뉴스'에 가깝다. 그가 지휘하고 만들어 방송하는 뉴스기도 하고 그가 보도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보게된 뉴스기도 하기 때문이다. 물론 내용과 진행에 있어서도 앵커의 이름값은 하고 있다.
'손석희의 뉴스'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많다. 그의 뉴스가 종편 채널의 뉴스라는 태생적이고 치명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월호 침몰 및 구조 뉴스와 관련해 많은 사람들이 '손석희의 뉴스'를 선택했다. 무엇보다 세월호 사고 희생자와 실종자 가족들이 그의 뉴스를 선택했다. 시청자가 훨씬 많은 지상파 뉴스들을 놔두고 가족들은 '손석희의 뉴스'에 스스로 인터뷰를 자청하고, 제보를 하고, 동행을 요청했다. 자신들의 생각과 필요를 가장 잘 보도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시청자들이 '손석희의 뉴스'를 선택한 이유도 자신들이 궁금해하는 것을 가장 잘 취재하고 설명해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건 '손석희의 뉴스'는 여전히 세월호 침몰 사고와 구조 문제에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 고민은 여기서 시작된다. 태생적으로 문제가 있고 재벌기업의 이익을 대변하는 종편에서 만드는 뉴스가 그나마 가장 공정한 내용을 제공한다는 현실 앞에서 "종편은 싫지만 '손석희의 뉴스'는 본다"는 모순적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공정성을 담보하는 방송 언론이 거의 사라질 위기의 상황에 직면해 있다. 위기를 만들어낸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일개 시청자에 불과한 나의 개인적 견해로는 무엇보다 진정한 방송 언론인의 품귀 현상에서 기인하는 것 같다. 방송에서 뉴스와 시사 정보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아나운서가 하루 아침에 연예인이나 국회의원이 되고, 심지어는 청와대로 자리를 옮기는 일이 심심찮게 일어나는 세상이다. 물론 그들의 개인적 결정에는 토를 달 이유가 없다. 그렇지만 그 결정이 '울며 겨자먹기식'의 어쩔수 없는 결정이었든, 아니면 나은 수입, 인기, 명예를 위한 결정이었든 시청자들의 입장에서는 아주 씁쓸한 일일 수밖에 없다. 그들이 애초 다른 목적을 가지고 방송 언론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까지 품게 된다. 그들의 정체성 바꾸기가 배우가 되기 위해 미스코리아 대회에 참가한 사람들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결국 가자미 눈을 뜨고 애초 언론인의 사명이나 직업의식은 손톱 끝만큼도 없었던 것이 아닐까하는 의심을 하게 된다. 이런 현실에서 시청자들은 물론 젊은 방송 언론인들까지 모두 인정할만한 독보적인 언론인이 없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비극이다. 그것은 여전히 성숙한 민주사회로 진화 중인 우리 사회의 문제이기도 하고, 방송 언론인들의 집단적 문제이기도 하다. 직업의식이 투철한 방송 언론인의 품귀 현상이 빚은 열악한 상황은 결국 방송 뉴스에 대한 신뢰에 치명타를 입혔고 매우 유감스럽지만 이것이 현재 지상파 뉴스의 현실이다.
세계가 공유하는 보편적인 상식에 기초해 뉴스는 중립성과 공정성을 내세운다. 그러나 중립성은 약자를 외면하기 위한 핑계가 되지 않아야 하고 공정성은 자신의 이익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전락하지 않아야 한다. 뉴스는 또한 극한 감정과 분노가 치닫는 상황에서도 냉철한 분석과 논리적 접근을 추구한다. 그러나 그것은 인도주의와 도덕성 같은 인간 세상을 유지시키는 기본원칙을 견고히 하려는 것이지 현실을 외면하거나 냉소적으로 평가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부당하고 폭력적인 사회 구조를 바꾸기 위해 스스로 거리두기를 하고 냉정함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지상파의 뉴스는 시청자와 방송 언론인 모두가 공유하는 보편적 상식에서 벗어나 있다. 오히려 지상파 뉴스는 많은 시청자들이 가지고 있는 뉴스에 대한 무차별적 신뢰를 악용해 자신의 이익을 고려한 뉴스를 만들어내고, '뉴스'라는 강력한 힘을 가진 언어를 악용해 자신의 입장을 대변한다. 아무리 뉴스가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이 된 세상이라지만 너무 몰염치한 행태다. 자기 이익에 몰두하다보니 오히려 뉴스가 관심을 쏟아야 할 부당하고 폭력적인 사회 구조는 외면하고 때로는 묵인하는 일까지 하고 있다. 이것을 알아챈 시청자들이 지상파 뉴스를 외면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런 일이다.
뉴스를 망친 또 다른 이유는 방송의 왜곡된 상업성, 즉 왜곡된 방법으로 경제적인 이익을 추구하는데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방송은 모든 프로그램에서 시청률에 목을 멘다. 뉴스도 예외는 아니다. 보는 사람이 많아야 경제적 이익을 낼 수 있고 그래야 좋은 뉴스를 제작할 수 있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뉴스와 상업성은 모순적 단어인 것 같지만 꼭 그렇게만 볼 건 아니다. 시청자, 그러니까 뉴스 소비자의 필요에 철저히 응한다는 의미에서 상업성을 해석한다면 그렇지 않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지상파 뉴스가 추구하는 것은 왜곡된 상업성이다. 공정한 뉴스를 원하는 다수 시청자의 필요에 응하고 시청률을 올려 얻는 투명한 경제적 이익이 아니라 소수 기득권층을 대변하고 그것을 통해 얻는 불투명하고 왜곡된 경제적 이익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것이 이익을 확대하는 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손석희의 뉴스'가 차별성을 가지고 시청자들에게 호소할 수 있는 이유도 아마 상업성일 것이다. 시청자들이 있는한 손석희 앵커가 만들어 방송하고 싶은 뉴스는 JTBC 안에서 보장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적어도 세월호 사고 보도와 관련해서는 뉴스 소비자들에게 초점이 맞춰진 왜곡되지 않은 상업성이다.
뉴스를 만들고 방송하는 것은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특권 중의 하나다. 그것은 지상파가 됐건, 종편이 됐건, 대안 방송이 됐던 모두 마찬가지다. 크고 복잡한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좋든 싫든 직업적 언론인들과 그들이 만드는 뉴스에 의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씁쓸하지만 이것은 뉴스 소비자가 가진 한계다. 그렇지만 그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입맛을 까다롭게 바꾸는 뉴스 소비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제 뉴스를 만드는 어느 회사, 또는 집단에게도 100% 신뢰는 자동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까다로운 입맛을 가진 뉴스 소비자들의 관심은 어떤 내용의 뉴스인가다. 지상파, 종편, 대안 방송을 경계 없이 똑 같이 취급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 경계에 얽매이지도 않는다는 얘기다. 오히려 모든 뉴스에 까다롭게 감시의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는 얘기다. 까다로운 뉴스 소비자들은 하늘에서 떨어진 신뢰라도 가지고 있는양 행세하는 지상파에 더 후하지도 않고 종편이라고 무조건 냉대하지도 않는다. 때문에 이제 더 이상 '손석희의 뉴스'가 지상파 뉴스보다 낫다고 해서 당황하지도 않고, 지상파의 뉴스가 자기 이익에 목맨다 해도 처절한 배신감을 느끼지도 않는다. 그들은 단지 모든 뉴스를 감시하고 시청률로 '제대로 보답'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다. 지상파의 기득권도, 종편의 치명적 한계도, 대안 뉴스의 정당성도 모두 감시망을 피해갈 수는 없다는 것이다.
'평화갈등 이야기 > 평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련된 분노, '미개한' 분노? (0) 2014.05.26 의리의 대한민국? (0) 2014.05.20 기업의 사회적 책임 (0) 2014.05.09 세월호 사고와 공공성 (0) 2014.05.03 구원파의 교회, 한국의 교회 (0) 2014.0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