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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비뚤어진 욕망 - 크림반도평화갈등 이야기 /국제평화 2014. 3. 17. 00:00
작년 11월 이후 계속되고 있는 우크라이나의 정치 불안은 크림반도에서 정점을 찍었다. 3월 16일 크림자치공화국에서 러시아 귀속을 묻는 주민투표가 치러졌다. 중간 집계 결과 95% 이상이 러시아 귀속에 찬성하고 3.5%만이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선거위원회는 밝혔다. 압도적인 수의 러시아계 주민들은 결과에 환호하고 있고 뒤에서 가장 크게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은 러시아다. 우크라이나와 크림자치공화국의 비러시아계 주민들은 속전속결로 이뤄진 이번 투표에 망연자실하고 있다. 미국과 EU를 중심으로한 서방국가들은 주민투표 자체는 물론 결과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작년 11월 야누코비치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EU와의 관계를 끊고 친러시아로 정치 노선을 변경하자 수도 키에프에서 대규모 시민 저항이 시작됐다. 2004년 오렌지혁명 이후 최대 규모의 시위로 최대 80만 명이 시위에 참여하기도 했다. 독립광장은 시위대로 가득찼고 12월에는 마침내 시위대가 수도 키에프의 시청을 점거했다. 정부의 강경진압과 시위대의 강경 대응은 고조됐고 급기야 올 2월에는 유혈 사태까지 낳았다. 2월 18일 경찰을 포함해 18명이 사망했고 20일엔 최악의 유혈 사태가 발생했다. 48시간 동안 전쟁터로 변한 키예프 도심에서 88명이 사망했다. 일부 시민들은 조준 사격에 의해 사살되기도 했다. 2월 말 결국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쫓겨났고, 야당을 중심으로 임시 정부가 꾸려졌다. 그러자 러시아계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크림반도의 크림자치공화국에서 반대 시위가 일어났고, 급기야 전략적으로 크림반도를 포기할 수 없는 러시아가 개입하기 시작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정치 불안을 이용해 크림자치공화국을 러시아로 귀속시키려는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러시아계 주민들을 보호한다는 핑계로 군사 개입을 시작한 러시아는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고 속전속결로 주민투표까지 몰고갔다.
러시아가 이미 귀속 절차를 시작했으니 크림반도가 러시아 땅이 되는 것은 시간 문제다. 주민들이 원한다면 문제될 것도 없다. 그런데 서방국가들과 우크라이나가 제기하는 문제는 주민투표의 합법성 문제다. 우크라이나 헌법을 위반했고, 다수의 주민들이 원하는 일일지라도 러시아 군대와 여기저기서 나타난 자경단의 압력 하에서 실시됐으며, 공정한 투표도 이뤄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실제 한 사람이 2표를 행사하는 것이 국제뉴스 기자들에 의해 목격되기도 했단다. 선거위원회는 85% 이상이 참여했다고 말하지만 공포 분위기 때문에 많은 우크라이나계와 타타르계 사람들이 투표를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들 중 일부는 안전을 위해 이미 다른 곳으로 피신을 간 상태다. 절차 면에서도 준비 없이 마구잡이로 이뤄졌기 때문에 정당성을 확보하기 힘들다. 통상 민족집단간 갈등이 있는 지역에서 찬반 투표가 이뤄질 경우에는 적어도 몇 개월 동안 사전 작업이 이뤄지고 공정한 절차를 위해 국제사회의 참관 하에 투표가 이뤄지는 것이 통례다. 그런데 이번 주민투표는 이런 기본적 절차를 하나도 거치지 않았다. 결국 이번 주민투표는 크림자치공화국을 귀속시키려는 러시아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최소한의 절차에 불과했다.
미국과 EU 국가들이 매서운 비난을 퍼붓는 이유는 물론 그들 나름의 정치적 계산이 있기 때문이다. 그 이면에는 러시아와 서방 국가들 사이의 패권 다툼도 있고, 천연가스나 곡물 시장을 둘러싼 경제 문제도 있다. 하긴 국제 문제에서 정치적 계산이 들어가지 않은 문제가 어디 있으랴. 그럼에도 러시아를 비난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력을 이용해 막가파 식으로 크림반도를 장악하고 러시아에 귀속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안하무인 독재자 푸틴의 러시아다운 면모를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뻔뻔하게 우크라이나 영토에 러시아 군대를 배치하고,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 압력을 가하고,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해 단시간에 주민투표까지 밀어붙였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국제사회는 푸틴의 러시아를 막을 방법은 없는 것일까? 사실상 현재로선 실효성을 가질만한 방도를 찾기 힘들다. 서방국가들은 러시아 제재를 언급하고 있지만 그것이 실현될지, 또는 효과를 발휘할지는 알 수 없다. 이번 크림자치공화국 사건은 경찰력이 없는 국제사회의 약점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다. 물론 국제사회는 문제적 국가가 나타났을 때 정치, 경제, 군사 제재등 각종 압력을 행사한다. 그런데 상대가 그것을 무시하면 그만이다. 국제사회가 명분을 가지고 한 나라 일에 개입할 수 있는 경우는 세계 평화가 위협받을 때, 그리고 대규모 인권유린 사태나 인명 피해가 예상될 때 같은 아주 제한적인 경우 뿐이다. 이런 경우에는 전 유고연방이나 리비아에서 본 것처럼 군사 개입까지 가능하다. 그런데 우크라이나 크림반도의 경우는 어느 것도 충족되는 상황이 아니다. 그러니 안하무인 독재자 푸틴이 벌이는 비상식적인 일조차 손 놓고 바라보는 수밖에 없다.
크림자치공화국이 러시아로 귀속되는 것은 시간 문제겠지만 그럼에도 그에 반대하는 우크라이나계와 타타르계의 저항이 시작될 가능성도 있다. 크림반도에서는 아닐지라도 러시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우크라이나 동부 도시들에서 러시아계와 우크라이나계의 충돌이 잦아지고 결국 우크라이나 전체의 정치불안이 가중될 수도 있다. 크림자치공화국에서 저항시위가 일어나면 즉시 강경 진압이 시작될테고 유혈 사태가 벌어질 가능성도 크다. 러시아 귀속을 원치 않는 사람들에게 이번 주민투표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힘이 없으니 강력히 저항하기도 힘들다. 러시아 군대와 자경단이 판을 치는 상황에서는 더욱 힘들다. 크림자치공화국의 러시아 귀속은 러시아계에게는 환호할 일이겠지만 비러시아계 사람들, 민족간 혼인을 한 사람들, 독재 냄새가 풍기는 러시아보다 자유로운 유럽과 가깝게 지내길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현재의 삶과 미래, 나아가 생존이 걸린 절박한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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