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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기초 8 비폭력, 인간성 회복을 위한 선택평화갈등 이야기 /평화 2019. 1. 15. 14:27
3.1 만세운동, 비폭력 저항
평화는 평화적 방식을 통해 성취되어야 한다. 그것이 평화를 위한 모든 계획과 실행의 원칙이다. 비폭력은 가장 급진적인 평화적 방식의 하나로 모든 폭력을 거부하고 나아가 폭력 제거와 평화 성취를 위해 비폭력적으로 저항하는 것을 의미한다. 흔히 비폭력은 물리적 폭력을 동원하지 않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비폭력은 물리적 폭력은 물론이고 구조나 문화를 이용한 폭력에까지 비폭력으로 대응하고 저항하는 것, 다시 말해 구조적, 문화적 폭력에 구조적, 문화적 평화로 대응하는 것까지 포함한다. 평화의 성취는 취한 방식과 과정에 따라 평가되기 때문에 비폭력은 평화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한다. 폭력을 통해 평화가 성취될 수 없지만 설사 그런 일이 있다 해도 그것은 일시적이거나 왜곡된 평화기 때문에 지속성을 가질 수 없다.
비폭력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은 모순적이다. 기본적으로 비폭력을 지지하지만 현실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흔히 지적하는 것은 비폭력의 비합리성과 비효율성이다. 비합리성은 폭력으로 당장 안전이 위협받거나 다수의 희생이 예견되는 상황에서 비폭력이 합리적 선택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효율성도 떨어진다고 지적한다. 물리력을 동원하면 짧은 시간에 상황을 제압하거나 진정시킬 수 있는데 비폭력 원칙 때문에 물리력을 쓰지 않는 것은 결국 폭력을 허용하는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비폭력은 비겁한 자의 선택과 핑계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1930년 5월 21일 수백 명의 인도인들이 다르사나 염전의 소금창고에서 소금을 가지고 나오기 위한 시위를 했다. 그들이 성공할 가능성은 조금도 없었다. 무장한 영국군의 무력 진압이 예상됐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줄을 지어 소금창고로 걸어갔고 예상대로 영국군은 무자비한 폭행을 가했다. 그 결과 320명이 다치고 두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들은 생필품인 소금을 독점하고 무거운 세금을 매긴 영국 식민지 정부에 대한 저항으로 간디가 시작한 비폭력 저항인 소금 행진을 이어받았다. 이것은 세계가 기억하는 대표적인 비폭력 저항 중 하나다.
1919년 3월 1일을 시작으로 조선반도에서는 3.1만세운동이 시작됐다. 전국 곳곳에서 사람들은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며 일본군의 무력 진압에 온몸으로 맞섰다. 그로 인해 7,500여 명이 사망하고 16,000명 정도가 부상을 입었다. 만세운동의 기본 기조는 비폭력 저항이었다.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서 폭력 시위가 생기자 이를 자제시키는 조직적 노력이 이뤄지기도 했다. 3.1만세운동은 인도의 소금 행진보다 먼저 있었던 비폭력 저항이었다.
비폭력의 합리성과 효율성?
어떤 사람들은 위의 두 비폭력 저항을 두고 비합리성과 비효율성을 지적한다. 사실 참여한 사람들 모두가 절대적 비폭력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비폭력 저항을 선택한 이유는 무장 저항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성과도 없지 않았다. 소금 행진은 영국 식민 통치의 무자비함과 부당함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됐고, 3.1만세운동 또한 일본 식민주의의 부당성과 폭력성을 선교사들의 눈을 통해 세계에 알리고 조선인들을 깨우치는 데 기여했다. 둘 다 당장 식민지배를 끝내는 사건이 되지는 않았지만 그로 인해 축적된 저항의 힘이 후에 식민 통치를 끝내는 토대가 됐다. 그들의 목적 또한 식민지배의 부도덕성과 부당함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었다. 그러니 그들의 비폭력 저항을 감히 합리성과 효율성이 없는 무모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없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비합리성과 비효율성은 평화와 비폭력이 가진 기준과는 다르다. 비폭력을 선택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이익과 평화를 위해 타인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이 정당한 선택이 될 수 없다. 나아가 폭력은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의 인간성을 파괴하는 것이므로 절대 인정될 수 없다. 그러니 폭력을 사용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은 선택이다. 비폭력이 폭력을 제재하거나 제거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비폭력 대응으로 상대를 감동시키고 무장해제시켜 결국 폭력을 중단시킨 사례는 많다.
비폭력은 절대 비겁자의 선택이 될 수도 없다. 비폭력을 선택하는 사람들은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는 것도, 도망치는 것도 모두 거부한다. 둘 다 폭력에 굴복하고 폭력을 승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비폭력 저항을 선택하고 자신의 생명이 위험해지는 상황에서도 그 선택을 포기하지 않는다.
비폭력의 궁극적인 목표는 인간성의 회복이다.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폭력을 가할 수 있는 이유는 타인을 자신과 동등하게 존중을 받아야 할 인간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폭력은 그 자체로 타인의 인간성을 파괴하는 행위다. 물론 가해를 하는 사람의 인간성도 파괴된다. 그러므로 폭력의 고리를 끊고 마침내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비폭력은 모두의 인간성을 회복하고 궁극적으로 평화적 공존을 실현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다.
비폭력주의자만이 비폭력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모두가 일상에서 폭력과 비폭력 중 어느 것을 선택할지 갈림길에 서곤 한다. 그때 선택한 한 번의 비폭력은 결국 자신과 타인의 인간성을 지키는 일이 되고 평화적 공존으로 나아가는 한 걸음이 된다.
* 위 글은 서울 YWCA의 월간지 <서울YWCA>의 '우리가 꿈꾸는 평화세상' 연재를 위해 기고한 글이며 잡지가 출판된 이후 여기에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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