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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집회의 비폭력저항평화갈등 이야기 /평화 2016. 12. 29. 10:16
비폭력저항의 효율성
지난 10월 29일부터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들은 비폭력저항의 새로운 역사를 써가고 있다. 거의 두 달 동안 계속되고 있고 앞으로도 당분간 계속될 촛불집회는 세계 민주주의 역사에서 뿐만 아니라 비폭력저항에서도 성공적인 사례로 남을 것이다. 전 국민을 뒷목 잡게 만든 국정농단 사건과 무능하고 다른 한편 악의적이고 치밀했던 대통령 비리를 규탄하기 위해 시작된 촛불집회가 이렇게 크게 번질 것이라고는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더욱이 그것이 성공적 비폭력저항 사례가 될 것이라고 상상하긴 힘들었다. 이제 촛불집회는 시작 때 설정했던 '대통령 퇴진' 목표 달성을 거의 눈앞에 두고 있다. 촛불을 든 사람들 하나 하나의 요구가 집회에서 결집되고 그것이 정치권에 영향을 미치면서 거의 작동을 멈췄던 시민 중심의 민주주의가 미미하게나마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비폭력저항을 얘기할 때 사람들이 가장 의심하는 것은 효율성이다. 설사 비폭력저항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고 나아가 바람직한 방식이라 생각해도 사람들은 비폭력저항이 실질적 효과를 가져올지, 그리고 원하는 변화를 가져올지 지속적으로 의심한다. 한 발 양보해 장기적인 효과는 낼 수 있겠지만 단기적인 효과는 낼 수 없다고, 그러기에 다급한 상황에서는 물리적 방식까지 동원해 상대에게 힘을 보여주고 필요하면 공격도 해야 효과를 낼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사실 촛불집회 초반에는 이런 의심과 주장이 표출됐었다. 국정농단의 규모와 내용 때문에 사람들은 멘붕상태가 됐고 신속하게 비정상을 정상으로 되돌리기 위해서는 '착한 시민' 담론에 사로잡혀 촛불을 들고 구호만 외치는, 그것도 경찰까지 배려하는 시위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나아가 그런 태도와 행동은 소극적이고 패배주의적인, 그리고 스스로를 '비폭력'이라는 '낭만적'이지만 '무책임'한 프레임에 가두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결과는 비폭력저항이 옳았음을 증명하고 있고 이제 그런 우려와 비판의 목소리는 사라졌다. 오히려 비폭력저항 방식을 유지해야 한다는 데 모두가 동의하고 있다.
물론 촛불집회가 완전한 비폭력저항이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비폭력저항은 물리적 폭력도 거부하지만 모든 종류의 폭력, 그러니까 구조, 문화, 언어 등을 통한 폭력까지 거부하기 때문이다. 여전히 촛불집회는 불가피하게 조직들이 주도하고 있고, 지극히 일부지만 촛불집회 참가자들 중에는 특정 인물의 인권을 침해하거나 인간 이하로 취급하는 표현이나 언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비폭력저항에는 맞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것까지 기대할 수는 없다. 촛불집회 참가자들이 비폭력저항을 신념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전략적으로 선택한 것이고, 모든 면에서 비폭력 행동과 태도를 강요하는 것 자체가 폭력이 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런 표현이나 언어는 극소수의 돌출 행동이나 발언인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촛불집회 자체는 대다수의 암묵적 동의로 처음부터 지금까지 비폭력저항 기조를 굳건하게 유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불가피한 선택
촛불집회가 비폭력저항이 될 수 있었던 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심각성과 절박감이다. 국정농단의 정도가 너무나 심각했고 당장 문제를 제기하고 바로잡지 않으면 나라 전체가 혼란을 넘어 뿌리까지 흔들릴 것을 모두가 우려했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사람들이 선택한 것은 국민으로서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가장 솔직하게 표출하는 것이었다. 분노가 가장 컸지만 그것에만 집중하면 자칫 감정적 대응으로 왜곡될 것을 우려해 최대한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방식을 택했다. 그것은 옳음과 진실에 대한 확신과 자신감에 기반한 것이었다. 오히려 심각성과 절박감이 더 냉철하고 정제된 대응 방식을 가능하게 만든 것이다. 그런 표출 방식은 평생 '집회'라는 것에 참석해 본적도 없는 다수의 남녀노소 시민들이 결합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누구도 앞장 서서 자신을 따르라고 얘기할 수 없었고 그렇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설득력이 있고 객관성을 담보할 수 있는 방식과 내용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두 번째는 삶의 경험이다. 얼핏보면 정부와 경찰에게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서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각자의 삶의 경험에서 폭력을 동반한 방식이 별 효과를 내지 못한다는 것과 되도록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다른 사람을 설득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소시민적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그것이 평범한 사람들의 정서다. 이런 점은 폭력이 일반적인 언어고 거기에 '비', 그러니까 영어로 'non'이라는 말이 붙은 '비폭력'은 폭력의 파생어에 불과한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폭력'을 정상적이고 일반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역사가 '전쟁'으로 이뤄졌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전쟁이 없었던 시절은 기록되지 않았을 뿐 더 많았고, 사람들은 항상 '전쟁 없는 세상'을 가장 바람직한 세상으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것과 같다. 평범한 사람들은 어떤 합리성과 논리를 들이대도 폭력이 동반된 상황은 불편하고 안전하지 않으며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세 번째는 불가피성이다. 이번 국정농단과 부정부패 사건은 민주주의의 원칙 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 모든 분야의 도덕성과도 관련된 것이다. 합법성을 위장하고 또는 정말 합법적으로 이뤄진 모든 일에는 그런 일을 승인하고 묵인했던, 또는 각자 자기 자리에서 적극적, 소극적으로 가담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관여돼 있다. 그들의 도덕성에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서는 그들보다 우월한 도덕성을 내세워야 한다. 그래야 문제 제기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자존감과 품위도 지킬 수 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바로 비폭력저항이다. 어떤 분노, 절망, 절박감 속에서도 이성적이고 냉철하게 문제를 제기하고, 비록 법을 지켜야 할 사람들에 의해 유린된 법치주의지만 그것을 복원하기 위해 법적 테두리 안에서 저항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그런 불가피성이 평소에 상상하기 힘들었던 시민의식으로 표출되고 비폭력저항의 토대로 작용한 것이다.
네 번째는 인간에 대한 존중이다. 집회에 참가한 남녀노소 사람들은 자신이 시민으로서, 아니 보다 근본적으로 인간으로서 존중받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도 시민으로서, 나아가 인간으로서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의도하지도 않았고 비폭력저항에 대해 깊이 알지도 못했지만 사람들은 비폭력저항의 근본 원칙과 의미인 비인간화의 거부와 인간성의 회복에 동의하고 공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상호 존중이 모두에게 안전한 환경과 공간을 보장하고, 그것이 결국 자신들의 주장에 정당성과 품위를 부여해 원하는 변화를 가능하게 만들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인간성 회복과 변화
촛불집회의 비폭력저항은 정치사회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구체적 방식에서도 많은 긍정적 결과를 내고 있다. 기존의 비폭력저항은 시민불복종, 준법저항, 보이코트, 플래시몹, 단식 등 진지한 방식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촛불집회에 나온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다가가고 서로를 설득해야 하는 환경 때문에 더 기발한 것들을 개발하게 됐다. 그래서 냉소적 유머, 창의적 퍼포먼스, 정보기술의 활용 등이 등장했다. 이런 방식은 앞으로 비폭력저항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고 효과도 증폭시킬 것이다. 촛불집회를 계기로 비폭력저항은 훨씬 더 복잡하고 고급스럽고 정교한 방식으로 진화할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생각할 것은 촛불집회의 비폭력저항이 가지는 특수성이다. 촛불집회 참가자들은 한국사회 전체와 비교하면 소수지만 90% 이상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때문에 조급함이나 고립감이 없이 지금까지 비폭력저항을 고수할 수 있었다. 또한 그런 여론 때문에 정치권과 언론의 적극적 지지가 계속되고 있고 그것이 다시 정치 영역에서 현실화되는 과정을 경험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비폭력저항은 소수 사람들의 저항이고 단기간에 가시적 효과를 기대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조급함과 고립감을 경험하기 쉽다. 그 결과 전략적으로 선택한 비폭력저항을 포기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일도 생기곤 한다. 그럴 때마다 애초에 왜 비폭력저항을 선택했는지, 왜 계속해야 하는지, 그것의 원칙과 의미가 최종적으로 향하는 곳은 어디인지를 고민해봐야 한다. 그것은 바로 모든 사람의 인간성 회복과 모두를 위한 변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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