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통령과 최소한의 정의평화갈등 이야기 /평화 2016. 11. 17. 10:00
문제는 정의다!
몇 년 전 정의에 대한 사회 담론이 유행했었다. 그 유행은 유감스럽게도 한 미국 교수가 쓴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촉발됐다. 경제정의, 사회정의 등을 통해 수십 년 동안 사회운동 영역에서 얘기됐던 정의가 대중과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고 결국 미국산 담론을 통해 우리사회에 확산된 것이 다소 유감스런 일이었다. 하지만 이로 인해 두 가지가 확인됐다. 하나는 사람들이 '정의'에 전혀 무관심하지 않다는 것, 그리고 정의로운 사회에서 살고 싶은 욕망이 크다는 것이었다. 정의롭지 않은 사회에 대한 불만이 크고 일상에서 직면하는 부정의로 인해 시시때때로 절망을 경험한다는 것도 확인됐다. 비록 각자가 원하는 구체적인 정의는 다를지라도 정의로운 사회가 곧 상식적인 사회라는 점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하고 있었다.
정의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앞에서 얘기한 경제정의, 사회정의 외에 사법정의도 있고 지구온난화 및 기후변화와 관련된 기후정의도 있다. 그런데 사람들이 보통 생각하는 정의는 이런 갖가지 정의를 갖다 붙이기에도 어색한 아주 소박한 정의다. 한 마디로 억울한 일 없는, 자신이 한 일에만 책임을 지고 자신이 한 만큼 대가를 받고, 그리고 사회 구성원으로서 공정하고 공평한 대우를 받는 것이다. 솔직히 이 정도 정의도 이뤄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민주사회라고 볼 수도 없다. 그럼에도 우리사회에서는 이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평범한 사람들은 매일매일 고군분투하며 산다. 사회가 조금 더 발전하면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지는 않아도 최소한 정의가 '개무시'되는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하며 말이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겼다. 아니 이미 치밀한 계획 하에 전개되고 있었지만 까맣게 속고 있었다. 바로 대통령이, 그리고 옆에 붙여서 권력을 거머쥔 몇 사람들이 나라의 모든 이익을 독점하고 국가를 사유화한 일이 드러난 것이다. 특히 대통령과 그의 최측근이 자신의 이익에 도움될 사람들을 골라 그들과 국가의 모든 사업과 직책을 나눠 갖는, 그리고 대통령이라는 권력을 이용해 시센 말로 "삥'을 뜯고 '뒷거래'를 하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만천하에 드러난 것이다. 조금이라도 나은 사회를 위해 수십 년 동안 인내하고 나름 각자의 자리에서 노력도 했건만 통치자의 정의는 독재시대에서 한 치도 나아진 것이 없었다. 그리고 피해는 고스란히 힘 없고 빽 없는 사람들에게 돌아갔다. 사람들이 분노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한 점의 정의도 기대할 수 없는 대통령, 최순실, 일부 공직자들, 그리고 그들과 한 패가 된 사람들 때문에 낮은 수준의 소박한 정의조차 무참히 짓밝힌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결국 자신들의 삶을 어렵게 만든 것이다. 제 정신이면 어찌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누구를 위한 정의인가?
정의가 처참하게 짓밟힌 상황이지만 사람들은 정의를 포기하지 않고 있다. 정의를 포기하면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선택한 것이 최소한의 정의다. 대통령과 최순실, 그리고 그들과 협력하고 그들에게 봉사한 이들을 법에 따라 조사하고 처벌하는 것 말이다. 민주사회에서 최소한의 정의로 여겨지는 사법정의를 적용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장벽에 부딪쳤다. 모든 불법과 비리의 몸통인 대통령이 '버티기'를 시작한 것이다. 기대할 것이 하나도 안 남았다는 것은 이미 알았지만 이것은 급이 다른 국민 뒤통수 때리기다. 민주사회의 최소 기준이자 상식인 사법정의에 도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헌법을 들이대면서 말이다. 정치적, 사회적, 도덕적 책임도 아니고 법의 테두리 안에서 판단받는 것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민주국가 대통령이 법의 한계를 악용해 사법정의를 거부하는 웃지 못할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이쯤이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질문하게 된다. 과연 누구를 위한 정의인가? 누구를 위한 정의여야 하나? 평화연구에서는 약자를 위한 정의를 얘기한다. 약자가 억울하게 생각하지 않고 인정할 수 있는 수준의 정의라면 당연히 모든 사람에게 공정하고 공평한 정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른 말로 강자의 기득권을 보호하지도, 그들을 특별 대우해 주지도 않는 정의를 말한다. 사실 사법정의도 원칙적으로는 같은 주장을 한다. 모든 사람이 '법 앞에 평등하다'고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너무 노골적이고 공개적으로 강자의 정의가 요구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대통령이 법적으로 부여된 권한을 주장하며 자신의 잘못을 덮고 국민의 요구를 거부하는 상황 말이다. 법에 따라 자신의 권리가 보호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뻔뻔하고 오만하게 강자를 위한 왜곡된 정의를 주장하고 있는 상황 말이다.
우리는 계속 대통령에게 최소한의 정의, 곧 사법정의를 적용할 것을 주장해야 한다. 아니 주장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우리의 마지노선이기 때문이다. 물론 최소한의 정의라고 가벼운 것도 실현이 쉬운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조차 사라지면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계속 요구할 수밖에 없다.
이 답답한 상황에서 드는 생각은 앞으로 공직자를 선출할 때는 반드시 '정의'를 판단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정의에 대한 민감성이 있는지, 정의를 알고 실현할 의지가 있는지, 정의를 정치적 소신으로 삼고 있는지, 정의를 실제 정치와 연결해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를 따져봐야 한다는 것이다. '정의란 무엇인가'란 책에 나온 것처럼 아리송한 문제를 들이대고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봐서라도 말이다. 다음 대선에서는 제발 민주사회의 최소 기준이자 상식인 정의도 모르는 무식한 자가 아니라 정의를 아는 사람을 뽑자. 혹시 아나. 다음 대선이 예상보다 빨리 다가올지....그러니 지금부터 준비를 하자.
'평화갈등 이야기 > 평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재벌, 돈 많은 게 죄? (0) 2016.12.08 교회, 민주시민을 거부하다 (2) 2016.12.01 우리의 미래는? (0) 2016.11.11 분노가 구조의 변화로? (0) 2016.10.31 대통령과 최순실, 힘의 독점과 폭력사회 (0) 2016.1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