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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스, 숫자로 불려지는 사람들평화갈등 이야기 /평화 2015. 7. 1. 12:48
2015년 7월 1일 현재 사망자 33명, 확진자 182명
메르스 상황과 관련한 모든 것은 숫자로 알려진다. 전체 통계는 물론 각각의 확진자도 모두 숫자로 불려진다. 사망한 사람들도 이름이 아니라 확진 번호로 알려진다. 숫자가 사람을 대체하고 있는 것이다. 개인 신상을 드러내지 않기 위한 조치지만 우리는 이제 이 숫자에 너무 익숙해졌다. 사망자가 29명에서 30명으로 바뀔 때도, 특정 번호의 환자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할 때도 우리는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저 그로 인해 바뀌는 사망자 통계와 치사율에만 관심을 둔다.
전염병 발생 40일 만에 33명이 사망했다는 것은 아주 심각한 일이다. 의학 수준과 사회 체계에 대한 의존과 신뢰가 불안의 정도를 낮춰주고 있지만 그렇지 않은 상황이라면 대혼란으로 거의 사회가 마비됐을 것이다. 지난 40일 동안 우리의 반응은 비교적 침착했다. 각자 집, 회사 등 익숙한 공간에 틀어박혀 자기 몸 챙기는데 온 힘을 쏟았다. 물론 관련 뉴스를 섭렵하고 정부의 무능함에 분노와 질타를 쏟아냈지만 지극히 상식적이고 의젓함까지 갖춘 방식이었다. 사망자 가족들과 확진자들마저도 거의 돌출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병이 확산되고 있는 상황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숫자가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을 사람이 아니라 숫자로 보고 기억하면서 우리의 판단이 흐려졌기 때문이다. 사망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물론 가족들의 슬픔도 숫자에 가려져 버렸다.
33명이 사망했지만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은 거의 없다. 모두가 사랑하는 가족과 주변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고, 그들만의 생활이 있었을 것이고, 메르스에 감염되기까지 겪었던 이야기들이 있었을 것이지만 우리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ㅇㅇ번 환자, ㅇㅇㅇ번 환자 등의 숫자에 그들의 삶과 이야기가 모두 가려져 버렸기 때문이다. 또한 숫자로 그들을 얘기하는 것이 타당하고 충분하다고 생각해 더 알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숫자를 붙인 것이 애초 개인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이제는 그 숫자가 사람에게 존중과 위로를 표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다. 숫자로 인해 희생자들을 애도하고 그들의 가족들과 슬픔을 나누는 일은 어렵게됐다. 숫자로 인해 그들의 이야기에 공감할 수도 없게 됐다. 숫자로 인해 사망자 가족들은 적절한 위로를 받지 못하고 고립되고 속으로 슬픔과 분노를 삼켜야 하는 상황이 됐다.
숫자를 걷어내야 할 때
사람은 이름으로 기억된다. 이름을 부를 때 그 사람의 삶과 관계가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세월호 사고 후 우리가 희생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불렀던 것도 희생자들을 뭉뚱그린 숫자가 아닌 각각의 온전한 사람으로 기억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서였다. 이제 숫자로 가려진 메르스 사망자들의 삶도, 그들을 잃은 가족들의 이야기도 숫자 밖으로 끄집어내야 한다. 그들의 이야기를 사회가 들어주고 인정하고 공감해줘야 한다. 불가항력인 전염병이 아니라 허술한 정부 대응과 사회 체계가 그들의 희생을 야기했기 때문이다.
'웨스트 윙'이라는 미드가 있다. 그 드라마에 나오는 백악관은 온갖 정치적 로비와 협상이 이뤄지는 곳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미국 시민권을 가진 모든 사람의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대통령이 사는 곳이기도 하다. 그 드라마의 백악관에는 분쟁 지역을 취재하다 납치돼 살해된 기자의 가족을 위로하고, 전쟁에서 사망한 사병의 부모에게 전화를 걸어 사죄하는 대통령이 사는 곳이다. 그것은 정치적 행위이자, 책임을 인정하는 행위이자, 인간에 대한 존중을 표하는 행위다. 물론 드라마가 모두 현실을 반영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마 미국사회가 원하는 이상적인 대통령의 모습을 그렸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드라마의 성격상 상당 부분 사실을 반영했을 것이라는 점도 짐작할 수 있다. 이 얘기를 하는 것은 부러워서가 아니다. 어느 나라에서건 이런 것이 정상이라는 얘기를 하고 싶어서다.
이제는 메르스와 관련해 숫자를 걷어내고 사람을 기억해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든다. 아직 완전히 상황이 안정된 것은 아니지만 이제 생각을 정리할 때인 것 같다. 그중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정부가 메르스와 관련해 숫자에 가려진 사람들을 인정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망자들을 한 사람, 한 사람으로 기억하고 그들의 가족들에게 사죄하고 진심어린 위로를 전하게 만들어야 한다. 사람을 드러내지 않는 숫자 뒤에 숨어 더 이상 책임을 회피하지 않도록 만들어야 한다. 현재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쉽지 않을 거라 예상되지만 여러 가지 수단을 통해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다. 메르스 사태는 확진자가 0 이 될 때 끝나는 것이 아니다. 숫자로 언급된 사람들이 제 모습을 찾을 때 끝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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