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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급실 뺑뺑이, 새로운 형태의 국가 폭력평화갈등 이야기 /평화 2024. 9. 10. 15:47
응급실을 찾아 말 그대로 전국을 헤매는 ‘응급실 뺑뺑이’가 매일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부산의 한 공사장에서 추락한 70대 노동자는 4시간 이상 이송 병원을 찾지 못해 결국 숨졌다. 탈장과 요로 감염 증세를 보인 충북 청주시의 4개월 된 아이는 응급 수술이 필요했지만 3시간이 지나서야 서울의 종합병원에서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청주에서 130km나 떨어진 곳이었다. 경련으로 응급 상황에 처한 2살 아이는 119 구급대가 도착한 후 응급실 11곳에서 수용 불가능 답을 받았다. 그러는 사이 상태는 악화됐다. 한 병원에서 응급 진료를 받았지만 119에 신고를 한지 한 시간이 훌쩍 지난 후라 뇌손상을 당해 현재 한달 째 의식불명 상태다. 비슷한 사례는 곳곳에서 들려온다.
한 국회의원실을 통해 공개된 ‘소방청 구급활동 자료’에 따르면 지난 6월부터 8월까지 환자를 이송하는데 1시간 이상 소요된 경우는 전공의 파업이 없었던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8%나 증가했다고 한다. 기록적인 증가율을 보인 곳들도 많았다. 이송에 1시간 이상 걸린 환자 증가율이 가장 높은 곳은 대전으로 260% 늘어났고 대구 208%, 창원 166%, 서울 137% 등의 증가율을 보였다. 응급환자인데 병원 도착까지 1시간 이상이 걸리면 결국 골든 타임을 놓치는 것이고 119 구급대가 출동한 의미가 없어진다. 또 다른 통계도 있다. 국립중앙의료원의 ‘응급실 환자 내원 현황 자료’에 따르면 전공의들이 의료 현장을 떠난 기간(2-7월)에 응급환자 수는 17% 감소했다. 그러나 응급환자 1,000명당 사망률은 6.6명으로 전년 동기 5.7명보다 증가했다. 응급환자는 줄었는데 응급실에서 목숨을 잃은 환자는 늘어난 것이다. 환자 수가 줄은 것까지 감안하면 사망률은 이전에 비해 훨씬 높아졌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중증 환자가 의료진 부족으로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했을 가능성이 컸음을 의미한다. 또한 권역응급센터 사망률은 일 년 전에 비해 3.9명 감소했지만 지역응급센터 사망률은 일 년 전보다 1.6명 늘었다고 한다. 광역응급센터를 가지 못한 중증 환자가 지역응급센터로 몰리면서 사망률이 늘어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얘기다.
현재 의료 상황, 특히 촌각을 다투는 응급환자가 병원을 찾지 못해 길에서 헤매다 목숨까지 잃는 상황은 충격적이다. 2024년에 ‘선진국’이라는 대한민국에서 있는 일로 믿기 힘들 정도다. 이것은 분명한 인재고 무슨 변명을 들이대도 정부 정책과 대응의 실패다. 그런데 ‘정부 정책과 대응의 실패’라는 표현은 너무 순화된 것이라 문제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식할 수 없게 한다. 현재 의료 상황이 국민의 생명을 위협하고 실제 누군가의 생명을 앗아가고 있는데 말이다. 이것은 명백한 폭력이다. 그리고 그 폭력의 가해자는 정부다.
사진 출처: 보건복지부 홈페이지
정부가 국가를 운영하는 주체라는 점에서 정부의 폭력은 ‘국가 폭력’이다. 국가 폭력은 국가가 국민에게 가하는 모든 종류의 폭력을 말한다. 그것은 보통 국가의 구조, 정책, 운영 등을 통해 국민에게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가해진다. 우리가 사회 폭력이라고 일컫는 많은 폭력이 사실은 국가 폭력인 경우가 많다. 지금의 상황 또한 그렇다.
폭력의 개념을 고안한 요한 갈퉁은 폭력을 “잠재적인 것과 실제적인 것 사이의 차이를 만드는 원인”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만일 18세기에 한 사람이 폐결핵으로 사망한다면 의학적으로 피할 수 없는 일이기에 폭력으로 볼 수 없지만 의학적 자원이 있음에도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거기엔 폭력이 존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했다. 즉 한 사람이 80세까지 살 잠재성을 가지고 태어났는데 피할 수 있는 병으로 50세에 사망했다면 30년은 결국 폭력 때문에 잃어버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가 1960년대 말에 쓴 논문의 내용이 현재의 상황에 너무 잘 들어맞는 게 신기할 정도다. 또 다른 설명도 있다. 그는 구조적 폭력과 그 위험성에 대해 폭력의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사회의 지속을 위해 폭력을 감수할 것을 요구한다고 설명한다. 나아가 폭력적 상황을 사회의 안정을 위해 불가피한 것으로 주장하고 사회 구성원들에게 그것을 강요한다고 설명한다. 사회 구성원 중에는 그런 주장에 저항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런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많다. 그 결과 사회적 승자(topdog)는 이익을 얻고 패자(underdog)는 피해를 입고 죽음에까지 이른다. 이 또한 현재 우리의 상황에 매우 잘 들어맞는 설명인데 승자는 정부와 정부를 움직이는 사람들이고 패자는 국민들이다. 물론 정부가 패자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건 결국 많은 사람이 피해를 보고 난 이후일 것이다.
이론적 설명을 통해 보면 현재 벌어지고 있는 상황은 국가 폭력 때문에 생긴 일이고 그 자체로 국가 폭력이기도 하다. 물론 가해자는 국가를 운영하는 정부고 피해자는 국민이다. 문제는 그럼에도 정부와 관료들이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흔히 가해자가 폭력을 부인하는 것처럼 말이다. 또한 가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다시 말해 전 국민의 생명을 위협하는 문제의 심각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땜질식 처방만 내놓고 있다. 이것은 정부 ‘정책’이라는 언어적 왜곡을 내세우며 가해를 계속하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정부가 국가 폭력의 존재를 인정하든 하지 않든 이미 폭력은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그 폭력은 이미 오래전 논문에서 사례로 언급된 것이지만 21세기를 사는, 그것도 ‘선진국’이라는 대한민국에 사는 우리에게는 새로운 형태의 국가 폭력이다. 정부가 ‘의료 개혁’을 주장하며 환자와 전 국민을 위험에 빠뜨리고 있으니 말이다. 또한 의사 집단과 여전히 기싸움을 하면서 응급환자들이 죽어가는 것을 방치하고 있으니 말이다. 피해가 갈수록 증가하는 데도 사실을 부인하고 책임을 회피하는 건 의도적인 폭력이다. 폭력에 대응하는 방식은 폭력을 중단시키는 것이다. ‘정책’이란 그럴듯한 외피를 쓴 국가 폭력도 중단시키는 게 정답이다. 이는 모든 국민이 나서야 가능한 일이다. 두말할 필요 없이 의사들도 나서야 한다. 많은 의사가 현재 정부와의 대결 구도에서 자신들이 상대적 약자라고 생각하고, 그러므로 자신들은 피해자일 뿐 가해자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의사들은 의료 체계를 움직이고 지금도 선택권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의 환자, 그리고 잠재적인 환자들에게 가해자가 되지 않게 최선을 다해야 한다. 나아가 국가 폭력을 중단시킬 최선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 어쩌면 의사들은 현재의 국가 폭력을 중단시킬 수 있는 가장 큰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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