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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폭력이고 사회폭력이다 - 배우 이선균의 죽음평화갈등 이야기 /평화 2023. 12. 28. 16:55
많은 사람이 그의 죽음에 대해 ‘안타까운 일’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그는 ‘가해’를 당했고 한 마디로 자살을 ‘당했다.’ 그는 우리 사회의 고질적이고 가장 심각한 폭력의 피해자로 생을 마감했다. 이미 여러 차례 우리는 유명인, 특히 대중예술 영역에서 일하는 연예인들이 대중의 비난과 조리돌림이라는 사회폭력을 견디지 못해 자살하는 일을 목격했다. 그 폭력은 어린 나이 연예인들의 목숨도 잔인하게 빼앗았다. 그런데 이번에 또 같은 일이 발생했다. 다만 다른 게 있다면 이번엔 국가폭력과 사회폭력이 함께 가해졌다는 점이다.
국가폭력은 국가가 공권력을 이용해 가하는 폭력을 말한다. 주로 군과 경찰이 공권력을 휘두르는 주체가 돼 국민에게 가해를 한다. 우리 사회의 경우 국정원(과거에는 안기부)이나 정부 중앙부처 등이 국가폭력의 가해자가 되기도 했다. 공권력을 이용한 국가폭력은 한국전쟁 이전과 전쟁 동안의 민간인 학살과 체포, 군사 독재정권 시절의 이른바 공안사범 체포와 고문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세상이 변했다. 민주화 이후 군은 본래의 국방 의무를 수행하는 역할로 돌아갔고 경찰은 국민을 보호하는 역할을 강조하게 됐다. 그렇다고 국가폭력이 사라진 건 아니다. 새로운 사회에는 새로운 형태의 국가폭력이 있다.
국가폭력이라고 하면 흔히 과거 군.경의 학살이나 영화 ‘변호인’에 나오는 공안사건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공안사건이 아니어도 공권력 남용이나 악용으로 국민에게 피해를 입힌다면 그것은 모두 국가폭력이다. 배우 이선균 또한 국가폭력의 피해자였다. 그는 공권력을 가진 경찰에 의해 ‘내사’ 대상이 되었다가 며칠 뒤에 마약류관리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입건되어 피의자 신분이 됐다. 그의 신분은 이례적으로 내사 단계에서 드러났다. 설사 경찰이 언론사에 정보를 주지 않았다 해도 그건 경찰이 책임져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경찰은 책임지지 않았고 오히려 아무 증거도 없으면서 피의자로 신분을 전환해 공개 수사를 진행했다. 그에 대한 수사는 전국으로 생중계되다시피 했다. 피의자로 전환된 후 그는 간이 소변검사, 모발과 체모 정밀검사, 겨드랑이털 검사 등 세 번의 마약 검사를 받았지만 모든 결과는 음성이었다. 그 과정이 얼마나 힘들었을지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경찰은 공갈협박범의 진술 외에 아무런 증거가 없었지만 고인에게 계속 ‘혐의 인정’을 압박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그러나 그는 유명 배우였기에 여론의 비난을 피하기 위해 계속 경찰 조사에 협조해야 했다. 세 번의 소환 조사도 모두 공개로 이뤄졌다. 경찰 수사공보 규칙은 원칙적으로 사건 관계인을 포토라인에 세우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지만 경찰은 그 원칙을 지키지 않았다. 경찰은 공권력을 악용해 그를 언론에 먹잇감으로 내주었고 언론플레이를 수사에 이용했다.
그는 인권을 보장받지 못했다. 경찰은 살인자나 공갈협박범에게도 보장하는 인권을 그에게는 보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에게 돈을 뜯어간 공갈협박범의 얼굴은 지금까지도 공개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경찰이 저지른 국가폭력이다. 경찰은 수사를 위해 대중의 관심을 받고 비난에 쉽게 노출되는 ‘유명 배우’라는 그의 ‘취약점’을 악용했다. 어찌 보면 경찰은 ‘마약 투약 혐의’와는 별개로 마약 전과자들로부터 국민의 한 사람인 그를 지켜주지 못한 데에 미안함을 가져야 했음에도 말이다. 경찰이 공권력을 이용해 저지른 가장 큰 국가폭력은 그를 증거도 없이 범죄자 취급을 한 것이었다. 경찰은 공개 소환을 통해 그를 여론 재판대에 세웠고 그로 인해 수십 년 동안 성실하게 쌓아온 그의 커리어는 하루아침에 무너져버렸다. 이것 또한 경찰이 저지른 국가폭력이다. 경찰의 무리한 공개 수사로 인해 한국의 영화계가 입은 타격 또한 부수적이지만 결코 가볍지 않았다. 경찰의 공권력 남용과 국가폭력을 드러내는 또 다른 사실이 밝혀졌다. 고인의 변호인은 지난 12월 24일의 3차 소환 전에 “이 씨가 유명인이긴 해도 경찰이 이미 2차례나 공개 소환을 했다. 이번에는 비공개로 불러 달라고 요청했는데 받아주지 않았다”고 밝혔다. 당초 경찰은 “이 씨 변호인이 비공개 소환을 요청하면 받아주겠다”고 말했지만 실제로 요청을 하자 “어렵다”는 취지로 답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이유가 너무 조악하다. 경찰은 “일부 기자들이 공개 소환을 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이유를 댔다. 애초 경찰에겐 고인의 인권 같은 건 관심 사항이 아니었던 것이다. 살인범이라 할지라도 국민은 보호해야 한다는 경찰 본연의 임무에 대한 이해와 원칙도 없었다. 게다가 그는 살인범이나 흉악범도 아니었다. 기자들은 멋잇감을 달라고 졸랐고 경찰은 못 이기는 척하며 먹잇감을 던져 주었다. 이 얼마나 잔인한 폭력인가. 그들이 그게 얼마나 고인에게 잔인한 일인지 몰랐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다만 그것이 각자에게 이익에 되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경찰은 교묘하게 언론플레이를 했고 공권력이라면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교묘하고 비겁한 방식으로 수사를 하면서 고인의 인권을 유린했다. 이건 명백한 국가폭력이다.
고인의 죽음과 관련한 사회폭력은 말할 것도 없다. 그의 죽음을 ‘사회적 타살’이라고 불러도 결코 과한 표현이 아니다. 그는 ‘유명 배우’라는 이유로 사회의 과도한 관심을 받았다. 내사 단계에서 이미 이름이 밝혀져 내사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그때부터 이미 여론재판은 시작됐다. 우리 사회에서 강세를 보이는 ‘황색언론’은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주류 언론사조차 이에 편승했다. 언론사 또는 언론인이라고 부르기도 힘든 자들이 ‘혐의’와 상관없고 배우라는 직업과도 상관없는 일까지 경쟁하듯 보도했다. 유튜버들은 새로운 돈벌이가 생겨 신이 났다. 사람들은 몇 번의 클릭으로 황색언론의 기사에 동조했고, 클릭의 맛을 본 기자들과 유튜버들은 그를 난도질했다. 주류 언론조차 무분별하게 많은 기사를 쏟아냈고 그것이 그의 혐의와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제대로 구분하지 않았다. 이는 명백한 사회폭력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거대하고 강한 자가 발전의 에너지를 가진 폭력의 소용돌이를 멈출 수 없었고, 멈출 수 있는 사람들은 너무 소수라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아주 소극적으로 관계없는 기사를 클릭하지 않거나 유튜브 채널을 보지 않는 것밖에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업계 동료들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모두 숨죽여 경과를 지켜보고 있었을 것이고 그들에게는 그것이 최선이었을 것이다. 한마디라도 했다가는 여론의 뭇매를 맞고 황색언론과 유튜버들의 또 다른 먹잇감이 됐을테니 말이다.
사회폭력은 그의 마지막 가는 길까지 방해하고 있다. 그의 소속사는 일부 매체들이 그의 자택, 소속사, 장례식장 등을 기습적으로 방문해 취재하고 있다고 했다. 또 유튜버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장례식장을 방문해 소란이 빚어지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제발 제대로 “애도하고 추모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길 다시 한번 간곡히 부탁”한다고 호소했다. 자기 이익을 위해, 그리고 또 다른 선정적인 기사와 영상을 위해 이렇게 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 사회는 정상이 아니다. 너무나 추잡하고 잔인하고 폭력적이다.
연예인은 대중의 관심으로 존재하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은 사회로부터 엄격한 윤리적 판단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은 아니다. 그들은 도덕성과 전문성을 갖춰야 하고 그것을 통해 국민으로부터 판단과 심판을 받아야 하는 ‘공인’이 아니다. 그들은 자기 일과 관련해 재능을 갖추고 발휘하면 되는 사람들이고 그것에 대한 대가를 위해 스스로 조심하면 되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사생활이 맘에 들지 않는다면 그들의 예술적 결과물을 소비하지 않으면 된다. 그리고 연예인들은 그런 대중의 선택을 고려해 스스로 조심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그들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그것을 연예인의 의무처럼 강조한다. 그들을 심판대에 올려놓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군다. 그 심판대가 공정하지 않고 자기만족과 이익을 위해 재단한 추잡하고 천박한 것임에도 말이다. 우리가 사회폭력에 무감각하고 익숙해져 있음을 말해주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대다수 사람이 그런 일이 ‘연예인’이라는 직업을 가진 그들에게 가하는 폭력임을 인식하지도 인정하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막무가내의 사생활 노출과 비난으로 한 사람이 목숨을 잃어도 그저 ‘안타까운 일’ 정도로 취급한다는 점이다. 아마도 자신이 ‘폭력’에 가담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본질과 상관없는 일들, 과장되고 조작된 이야기들, 선정적인 내용 등을 클릭했다면 설사 그것을 생산하지 않았더라도 모두가 공범이다. 그것이 모여 결국 한 사람에게 사회적 사망이 선고되고 실제로 생을 마감하게 만드니 말이다. 이 얼마나 잔인하고 무서운 사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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