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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파업이 야기한 사회갈등, 다자 정책대화로 풀어야평화갈등 이야기 /갈등해결 2020. 9. 5. 15:02
잘못 꿴 첫 단추
정부와 의사들의 충돌은 일단 일단락됐다. 전공의들이 합의안 내용을 미리 알지 못했고 졸속이라며 문제를 제기하고 있지만 어느 정도 명분을 쌓다 중단할 가능성이 높다. 상위 단체인 의협이 합의안에 서명했고 내부 조율을 못한 것을 정부 탓으로 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복지부가 '진정성'을 보이기 위해 업무개시명령을 이행하지 않은 전공의 6명에 대한 고발을 취하하고 의사 국시 실기시험 재접수 기한도 연장했으니 말이다. 이번 의사들의 파업, 다른 말로 진료 중단은 복지부가 첫 단추를 잘못 꿴 데서 시작됐다.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정부의 신속한 태도 변화다. 처음엔 의사들의 파업 '협박'에도 의사정원 확대와 공공의대 설립을 핵심으로 한 정책 추진에 강경한 태도를 보이면서 재논의 불가를 천명했다. 진료 복귀를 거부한 일부 의사들을 고발까지 했다. 하지만 코로나 상황까지 고려했을 의사들의 실력 행사에 속수무책이 됐고 여당의 중재로 원점 재검토에 합의했다. 복지부가 스스로 처음에 단추를 잘못 꿰었음을 시인한 셈이다.
복지부가 처음 단추를 잘못 꿰었다는 것은 상세 내용에 부족한 점이 있더라도 정책 자체가 잘못됐다는 것은 아니다. 의사들의 저항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정책을 정교한 의견수렴 절차 없이 일방적으로 결정하고 발표한 것이 문제다. 의사들의 주장에 이해 못할 부분이 많지만 그들은 어쨌든 자기 삶과 관계된 일에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특히 자기 밥그릇이 걸린 문제라면 당연히 그럴 수 있다. 정부는 의사들의 저항을 고려해 최소한 다양한 이해관계자들로부터 사전에 목소리를 듣고 국민들과 정보를 공유해 정책을 보완하고 정당성을 알려야 했다.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참여한 논의 테이블을 만들어 일정 기간 운영했다면 더할나위 없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일반인도 쉽게 예상할 수 있는 문제를 복지부는 너무 쉽게 접근했다. 잘못 꿴 첫 단추는 더 큰 문제를 야기했다. 보건복지부와 의협이 의.정협의체 구성 합의서를 체결하고 향후 정책을 상호 협의를 거쳐 결정하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의료문제는 정부와 의사만의 문제가 아니고 전 국민의 생존과 삶이 걸린 문제인데 말이다. 합의서가 체결되자마자 시민들은 물론 보건의료 단체를 포함한 다수의 시민단체가 합의안을 '야합'으로 부르면서 저항하고 있는 이유다. 복지부와 의사들 사이 갈등 봉합이 다른 사회갈등을 야기한 셈이다.
다자 정책대화 테이블 만들어야
정부는 이제라도 정책을 제대로 추진해야 한다. 하나는 제대로 정책을 만들기 위해서고, 다른 하나는 또 다른 불필요한 사회갈등을 막기 위해서다. '원점 재검토'는 정책 포기를 의미하지 않고 정부 여당도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으로 믿고 싶다. 전공의들이 여전히 정책 '철회'를 요구하면서 저항하고 있고 많은 의사가 정책 불이행을 원하고 있지만 국민 전체의 생존과 삶이 걸린 문제를 자기 이익에만 초점을 맞춘, 그리고 극단적 방식으로 압력을 행사한 이익집단의 요구에 맞춰 결정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향후 할 일은 명료하다. 의사정원 확대와 공공의대 설립 등은 공공의료 문제이니 영향을 받는 모든 이익집단과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이 함께 논의하면 된다. 물론 논의에는 여론조사를 통해서든, 시민참여형 논의를 통해서든, TV 토론을 통해서든 일반 국민들의 의견도 수렴해 반영해야 한다.
정책을 제대로 추진하려면 지금이라도 정책대화 테이블을 만들어 6개월이든 1년이든 운영해 다양한 의견을 듣고 우리 사회 모두가 혜택을 볼 수 있는 장기 계획을 마련해야 한다. 복지부와 의협이 서명한 의.정협의체 구성 합의서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의협이 내부 분란으로 합의서 체결을 없던 일로 해준다면 고마운 일이겠지만 그렇게 될 가능성은 없을 것이다. 자기들에게 유리한 것을 내부 문제로 포기하지는 않을테니 말이다. 복지부도 한번 서명한 것을 무를 수는 없으니 그건 유지하되 공공의료와 관련된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에게 논의의 장을 제공하고 의견을 수렴하기 위한 장치로서 정책대화를 운영하면 된다. 의.정협의체는 정책대화의 내용을 참고해 협의를 진행할 수 있다. 또 의.정협의체에서 논의된 내용을 다자 정책대화에서 공유해 협의 내용의 합리성, 실행가능성,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신고리 5.6호기 건설 결정방식과 같은 공론화를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 방식은 적절하지도 효율적이지도 않다. 전문성을 가진 다양한 단체와 정부 정책을 감시하는 시민단체들의 심도있는 논의를 보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부는 일방적으로 정책을 만들고 추진할 법적 권한이 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불필요한 사회갈등이 생기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이번 일도 그중 하나다. 의사들의 저항은, 그리고 그에 대응해 결국 정책을 원점으로 회귀시킨 정부의 선택은 의료 정책이 정부의 일방적 결정으로 진행될 수 없는 사안임을 보여줬다. 동시에 의사 파업과 정부의 원점 재논의 합의에 대한 다수 국민들의 반대는 정부와 의사단체 사이의 합의로만 정책을 만들고 실행할 수 없다는 점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은 하나다. 전문성을 가진 다양한 집단과 국민들의 의견을 수렴해 정책을 결정하는 것이다. 모두가 이해하고 인정할 수 있는 투명하고 공정한 방식으로 말이다. 그러지 않으면 또 다른 파괴적인 사회갈등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장기적 안목을 가지고 좋은 정책을 만들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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