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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사회와 공존할 수 있나-코로나시대 교회의 민낯평화갈등 이야기 /평화 2020. 8. 20. 11:18
교회는 어떤 곳인가?
모든 사람이 사랑제일교회 발 코로나19 확산 상황에 분노하고 있다. 물론 거기로 인해서만 감염이 생기고 있는 것도 아니고 집단 감염이 처음도 아니다. 하지만 사랑제일교회 발 감염 상황은 목사와 신도들의 비협조 내지 고의적인 행정당국 '물먹이기'로 '예측불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분노와 동시에 사람들은 공포에 떨고 있다.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사랑제일교회 전광훈 목사와 그를 따르는 신도들의 비상식적 행동과 신앙생활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사랑제일교회로 인해 교회와 목사의 정체성과 속성에 대한 의문과 실망이 확산되고 있다.
교회는 신앙공동체다. 예수 죽음 후의 초기부터 교회는 '믿는 자'들의 공동체였다. 그후 성직자 중심의 교회가 되면서 타락의 길로 접어들었지만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모두를 위한 교회가 됐다. 종교개혁의 핵심 중 하나는 교회를 성직자의 소유물이 아닌 평신도의 공동체로 되돌리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성서와 해석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 또한 포함됐다. 하지만 지금의 한국교회는 어떤가? 아주 일부 교회를 제외하고는 종교개혁 이전의 시대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모습이다. 교회는 여전히 스스로를 성직자라 칭하는 목사들의 것이고 신자들은 그들을 따르는 추종자이자 맹신자들이다.
우리 사회 교회는 아주 폐쇄적이다. 교회가 사회에 봉사하고, 사회 이슈에 목소리를 내고, 때로는 사랑제일교회처럼 정치적인 일에 나서기도 하지만 그것이 폐쇄성을 벗어났음을 의미하진 않는다. 오히려 폐쇄적으로 자기 이익을 위해 사회 문제에 관심을 보이거나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교회는 대부분 교회 밖 사람들을 대상화하고 사회 이슈에 대해서도 자기는 선하다는 전제 하에 온갖 문제 제기를 할 뿐이다. 교회 안의 문제에 대해서는 신랄하게 문제 제기를 하거나 뼈를 깎는 변화 노력을 거의 하지 않는다. 아주 소수의 목사들이 그런 노력을 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변화를 이루기엔 턱 없이 부족하거나 계속할 경우 추방되곤 한다.
우리 사회 다른 집단들도 폐쇄적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교회는 다른 곳들과는 다르다. 많은 교회가 '교회'와 '세상'을 나누며 배타성과 타인에 대한 불신에 기초해 자기 결속을 강화하고 그를 통한 성장을 꾀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목사에 대한 절대적 충성과 신격화에 버금가는 목사 '찬양'이 있다.
교회는 사회와 공존할 수 있나?
우리 사회 대부분의 교회가 아주 폐쇄적이라는 점은 우리 사회의 불행이다. 그 불행은 지금 오만하고 이기적인 사랑제일교회를 통해, 그리고 역시 이기적으로 예배, 소모임, 수련회 등을 계속한 다른 교회들을 통해 확산되고 있다. 특히 사랑제일교회 발 코로나19 확산 상황은 고의적으로 방역수칙을 어긴 면이 짙기 때문에 사회의 지탄을 피할 수가 없다. 그런 지탄은 이제 전체 교회로 향하고 있다. 그러자 이런저런 교회 단체에서 사과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핵심이 빠져있다. 왜 사랑제일교회 같은 곳이 생겼고, 그런 교회로 신자들이 몰리고, 신자들이 그렇게 목사의 말을 맹목적으로 따르는지 등에 대한 성찰과 반성은 없기 때문이다. 근본원인을 다루겠다는 다짐 같은 것도 없이 소나기만 피하자는 식이다.
감히 말하건데 문제의 핵심은 목사다. 교회를 다녀 본 사람은 안다. 교회가 얼마나 목사 중심이고, 목사가 모든 것을 제 맘대로 할 수 있는 곳인지 말이다. 사회 현상이나 문제를 왜곡해 해석하고, 교인들을 잘못된 정보로 현혹시키는 사람 또한 목사다. 오래된 성서의 내용을 문자 그대로 보고, 그리고 성서에 대한 '자의적' 해석을 한 후 '설교'의 형식을 빌어 그것을 주장한다. 신자들은 그것이 신학적 논의에 기초한 것인지, 아니면 혼자 골방에서 만든 허무맹랑한 주장인지 구분할 능력이 없다. 아니 그렇게 하지 못하고, 하지도 않는다. 그저 자기들이 충성하고 복종하고 '찬양'하는 목사 입에서 나오는 말이기에 그냥 '아멘'이라고 답한다. 목사가 변하지 않으면 교회는 변할 수 없다. 하지만 권력을 독점한 목사는 변화를 거부한다.
대부분의 목사는 신학교에서부터 목사는 권위가 있어야 한다고 배운다. 그리고 실제 목회를 할 때 그런 주장을 반복한다. 단체에서 일하는 목사들도 동료들에게 목사의 권위를 인정하라고 요구하곤 한다. 목사는 자신의 권위가 지켜져야 진리를 전할 수 있고, 진리를 따르는 종교공동체를 이끌 수 있다고 주장한다. 도대체 권위는 무엇인가? 위엄이나 통솔력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 권위는 스스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진정성, 능력, 가치 등을 인정하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부여되는 것이다. 그런데 목사는 스스로 권위를 주장하고 그것을 거역하지 말 것을 강요한다. 사실 권위는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나 기업 경영자들에게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 권위는 자신의 능력과 전문성을 증명했을 때 주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권위는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전문성을 공유하고 소통할 때 강화된다. 목사의 권위도 성서를 해석하고 설명하는 전문가로서, 그리고 공동체 리더로서 제대로 역할을 할 때 주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절대 요구하고 강요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지만 목사는 요구하고 강요한다.
목사의 가장 큰 문제는 비민주적이라는 점이다. 남의 얘기를 듣지 않고 자기 확신이 강하다. 교회 안에서 유일하게 성서의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이라는 자기 인정 때문이고 신앙공동체인 교회를 이끄는 사람이라는 자부심 때문이다. 하지만 종교공동체인 교회도 조직이고 그 안의 사람들은 각자의 생각과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다. 하지만 여전히 교회에서는 목사의 의견이 교회 전체의 의견이 되고 다수의 의견조차 무시된다. 소수 의견은 설 자리도 없다. 합리적으로 토론하는 구조나 문화는 없다. 교단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다. 목사들은 자기들끼리 논의하고 그것이 마치 기독교 전체의 의견인 것처럼 호도한다. 자기 교회 신자들의 의견을 취합해 교단에 전달하지도 않는다. 그렇게 부지런하고 민주적인 목사는 유감스럽게도 본 적이 없다. 숙의 민주주의 담론과 실행이 트렌드가 되어가고 있는 시대에 교회는 여전히 전근대적이다. 사회 문제에 목소리를 내는 교회 단체나 기구에 속한 목사들도 그 단체나 자기 교회 안에서는 비슷하게 권력을 독점하고 있다. 일그러지고 폭력적인 교회의 근본적 구조와 문화에 기여하는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다. 목사가 독점하는 교회 구조화 문화, 그리고 권력과 권위에 집착하는 목사들 때문에 교회의 민주화는 이뤄지지 않는다.
물론 교회 안에는 비판적인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크지 않다. 그래서 조금 빠릿빠릿하고 요령 있는 신자들은 교회 안과 밖에서 이중생활을 한다. 하지만 대다수는 비뚤어진 '자부심'으로 전근대적이고 비민주적인 교회로 사람들을 이끌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안간힘을 쓴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공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교회에 맞게 바꾸려는 목적을 가지고 교류하고 관계를 맺는다. 이런 교회는, 그리고 신자는 사회와 공존하기 힘들다. 결국 교회 안을 변화시켜야 교회와 사회의 공존은 가능하다.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교회가 많다. 신자 수가 줄고 있다지만 여전히 교회는 많다. 그리고 교회는 사회에서 영향력을 갖기 위해 안달이다. 사랑제일교회는 그저 특별한 사례 중 하나일 뿐이다. 교회는 사회 곳곳에서 변화를 막고 있다. 교회는,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목사는 사회와의 공존을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현재 코로나19 상황에 대해 정말 미안한 마음이 있다면 말이다.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겠다는 오만한 생각은 하지 않으면 좋겠다. 그런 말을 내뱉을 상황이 아니다. 사회에 해는 끼치지 않겠다는 'Do No Harm' 다짐만이라도 한다면 사회에서 환영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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