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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기초 1 왜 평화를 얘기하는가평화갈등 이야기 /평화 2018. 4. 2. 09:33
평화학의 시작
평화는 긍정적인 단어다. 평화를 부정적으로 인식하거나 언급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평화에 대해 모호하거나 혼란스런 이해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평화를 언급하면서도 평화로운 세상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평화는 인식 차원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도대체 평화는 무엇이고 왜 평화를 얘기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평화를 언급할 때 전쟁을 떠올리곤 한다. 평화를 전쟁의 부재 상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럼 전쟁이 없으면 평화로운 건가요?”라고 물으면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고 답한다. 이에 대한 답은 간단하다. 전쟁이 존재하면 평화로울 수 없지만 전쟁의 부재가 평화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전쟁은 평화를 파괴하는 많은 폭력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럼에도 전쟁은 인간이 평화를 추구하게 만드는 핵심 역할을 했다. 평화에 대한 상상, 기대, 탐구 등은 전쟁에서 비롯됐다. 전쟁은 인간사회의 가장 극단적이고 광범위한 폭력이었기 때문이다.
평화연구와 평화학의 시작도 전쟁에서 비롯됐다. 본격적이고 조직적인 평화연구, 그리고 학문영역으로서 평화학의 시작은 20세기 중반에 시작됐는데 거기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이 1,2차 세계대전이었다. 연달아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사람들은 평화의 필요를 절감했다. 학자들은 전쟁 예방과 종식을 위한 구체적 이론과 접근을 탐구하고, 평화적 문제 해결 및 공존을 통한 전쟁 예방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런 필요와 탐구는 평화학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전쟁 없는 세상이 곧 평화로운 세상이 아님을 확인하게 됐다. 당시 세계는 인종, 계급, 성의 차이에 따른 차별과 인권침해, 노동 착취와 빈곤 등이 만연해 있었고 거기에는 항상 가해자와 피해자가 존재했다. 때문에 평화연구는 전쟁을 포함한 폭력의 원인과 그로 인한 희생, 그리고 궁극적으로 폭력을 제거할 방법을 탐구하는 데 초점을 맞추게 됐다.
폭력의 탐구
평화연구는 폭력의 탐구에 초점을 맞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폭력은 평화의 부재를 의미하고 동시에 희생의 존재를 의미한다. 폭력에 의해 누군가가 희생되는 집단, 사회, 세계는 평화롭지 않다. 그러므로 평화에 대한 관심, 상상, 탐구, 비전 등은 모두 폭력으로 인한 희생을 끝내는 것을 목표로 삼고 그것에 도달하기 위한 평화적 방법을 모색하고 실행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그렇다면 폭력이란 무엇일까?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폭력은 물리적 힘을 이용해 직접 신체에 해를 가하는 직접적 폭력이다. 사회가 성숙되고 민주주의가 발달할수록 직접적 폭력은 법의 감시 및 처벌의 대상이 돼 상대적으로 줄어든다. 구조적 폭력도 있다. 이것은 집단과 사회의 뼈대가 되는 구조적 장치와 그것의 실행을 통해 가해진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사회 문제들이 폭력적 구조에서 비롯된다. 구조적 폭력은 집단이나 사회에서 법적, 관례적 정당성을 확보한 것이라는 점에서 대응하기가 쉽지 않다. 또 다른 폭력으로 이념, 철학, 종교적 가르침, 전통, 담론 등을 도구로 가해지는 문화적 폭력이 있다. 이것은 가장 무서운 폭력이다.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지배하기 때문에 피해자도 자신이 피해를 입고 있음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흔하다. 그런 피해자는 다른 사람에게는 폭력의 가해자가 된다. 극단주의 종교적 가르침, 힘을 숭배하는 전통이나 담론 등을 통해 이런 문화적 폭력의 피해와 가해가 흔히 생긴다. 이렇게 분류되는 폭력은 서로 연결돼 있어서 하나의 폭력이라 할지라도 다른 둘을 함께 다루지 않으면 제거되지 않는다.
최근 시작된 미투(MeToo) 캠페인을 보자. 이를 통해 사회 각 영역에서 만연됐던 성폭력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런데 사건 하나에는 모든 폭력이 포함돼 있었다. 행동을 통한 직접적 폭력이 있었고, 조직의 구조와 힘을 이용해 누군가의 가해와 피해를 은폐하고 나아가 왜곡하려는 구조적 폭력이 있었다. 그런데 그 근저에는 문화적 폭력인 남성 중심의 조직문화, 여성 비하 및 차별의 가부장적 문화, 그리고 힘의 숭배와 악용을 정당화하는 담론, 관습, 전통 등이 자리 잡고 있었다.
우리 주변의 모든 폭력들이 우리로 하여금 평화를 얘기하게 만든다. 평화로운 세상을 상상하게 만들고, 평화를 공부하도록 독려하며, 구체적인 방법을 찾도록 등을 떠민다. 이론상으로만 가능한 일이지만 폭력이 살아 숨 쉬는 누군가의 생명을 빼앗지도 삶을 고통 속에 밀어 넣지도 않는다면 굳이 폭력의 제거와 평화의 성취를 얘기할 필요가 없다. 평화가 없더라도 그저 그렇게 살만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평화의 부재, 즉 폭력의 존재는 반드시 누군가의 희생을 의미하고 그것은 곧 생명의 상실이나 일상적 고통이 존재함을 의미한다. 그러니 평화는 추상적이거나 이념적인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생명과 삶을 좌우하는 아주 현실적인 문제다. 그것이 전쟁이든, 조직 내 왕따든, 성추행이든 마찬가지다. 평화는 인간에 대한 애정과 연대감을 가진 사람이라면 외면할 수 없고 함께 고민해야 하는 삶의 문제다. 이것이 바로 평화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 위 글은 서울 YWCA의 월간지 <서울YWCA>의 '우리가 꿈꾸는 평화세상' 연재를 위해 기고한 글이며 잡지가 출판된 이후 여기에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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