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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해, 참회와 용서가 없어도?평화갈등 이야기 /평화 2017. 8. 24. 12:16
사람들은 관계가 망가졌다고 생각할 때 화해를 언급한다. 화해가 필요한 가장 일반적인 경우는 심각한 갈등이 일단락된 후이다. 사소한 말다툼이면 겸연쩍지만 ‘미안했다’는 한 마디로 충분할 것이다. 관계가 망가진 것이 아니기에 회복할 이유도 굳이 화해라는 거창한 말을 꺼낼 이유도 없다. 그런데 옳고 그름을 주장하면서, 또는 자신에게 유리한 것을 얻기 위해 치열하게 싸운 이후에는 화해를 고민하게 된다. 문제가 일단락됐다고 관계가 자동으로 회복되는 것은 아니어서 불편함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이 쉽지 화해는 생각처럼 되지 않고 때로는 불가능한 일처럼 보이기도 한다.
화해는 사회 차원에서도 언급되지만 흔히 개인 차원의 것보다 훨씬 어렵다. 그러나 어느 정도 성공한 사례도 있다. 1994년 남아프리카공화국(이하 남아공)에서는 새로운 역사가 시작됐다. 넬슨 만델라가 총선에서 승리해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됐고 인종차별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아파르트헤이트가 실시됐던 수십 년 동안 정치 폭력이 만연했고 그로 인한 상처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수많은 국민이 폭력의 가해자이자 피해자였고 국가는 분열돼 있었다. 국민들 사이의 화해를 위해 정부는 진실과화해위원회(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를 설치했다. 위원회의 임무는 진실을 밝히고, 인권유린 관련 범죄를 기록하며, 피해자에게는 배상을 가해자에게는 사면을 허락하는 것이었다. 과거의 잘못을 밝혀 정의를 세우는 동시에 국민들 사이 화해를 위해 배상과 사면을 선택한 것이다. 사면은 진실을 밝히고 잘못을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했다. 개인적 이유가 아닌 정치적 동기와 압력 때문에 폭력을 저질렀고 온전히 진실을 말했음이 위원회에 의해 판명된 경우에만 사면을 받을 수 있었다. 국가가 이렇게 화해를 다루가 된 이유는 새로운 사회를 위해 사람들 사이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불가피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남아공은 정치적 전환기를 비교적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남아공의 시도가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화해를 가능하게 했는지는 의문이다. 용서, 그러니까 국가 차원에서의 사면이 가해자의 참회를 근거로 이뤄졌으나 그것이 피해자의 용서를 전제로 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화해의 전제는 참회와 용서다. 참회는 가해자의 영역이고 용서는 피해자의 영역이다. 누구도 참회나 용서를 대신해줄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개인의 결단과 상황에 따라 피해자가 일방적으로 용서하기도 하고 가해자가 먼저 참회하기도 한다. 무엇이 먼저이든 참회와 용서가 모두 이뤄져야 비로소 화해가 가능하다. 화해는 양쪽이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관계를 회복해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밀양’이라는 영화는 화해에 대해 생각하게 해준다. 주인공 신애(전도연 분)는 자기 아들을 유괴해 살해한 웅변학원 원장을 용서하기로 결심한다. 아들이 죽은 후 교회에 다니면서 위안을 얻고 신앙심이 깊어지자 신애는 용서가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러나 교도소에 있는 살인자를 방문한 신애는 예상 밖의 상황에 직면한다. 그가 이미 하나님께 참회를 했고 용서를 받았다고, 그래서 마음의 평안을 얻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혼란에 빠진 신애는 교도소를 나와 기절한다. 용서는 피해자인 자신만이 할 수 있는데 감히 누가, 설령 하나님이라도 어떻게 자신을 대신해 용서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신애는 목사와 교인들 앞에서 분노를 폭발시킨다. 살인자가 신애에게 참회를 했다면 둘은 화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용서는 있었지만 참회가 없었기 때문에 화해는 이뤄지지 않았다. 결국 용서마저 철회됐다. 영화라서 사례가 극단적이지만 현실에서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일상에서 화해의 문제에 직면한다. 이때 제일 먼저 생기는 의문은 ‘정말 관계를 회복하고 화해해야 하는가?’이다. 대답은 ‘yes'일 수도 ’no'일 수도 있다. 자주 마주치는 사이라면 화해의 필요가 클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대충 견딜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각자가 판단할 문제다. 다만 한 가지 명심할 것은 어떤 방식이든 잘못의 인정과 그에 대한 용서가 있어야 화해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어느 한 쪽이 먼저 참회를 하거나 용서를 할 수도 있다. 어느 것이든 용기 있는 행동이다. 그런 후에는 상대의 답, 다시 말해 참회나 용서가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하다. 상대의 응답이 없으면 관계의 회복도 화해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신이 용기를 냈다고 상대가 반드시 응답한다는 보장은 없다. 때문에 자신이 계산한 일정대로 화해가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상대가 준비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고 그 또한 화해를 위한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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