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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와 평화 운동평화갈등 연구/평화 2015. 5. 4. 01:00
한국교회와 평화운동: 한계의 극복과 새로운 접근의 모색
정주진
평화의 진화
지난 10여 년간 한국사회에서 평화라는 단어의 쓰임새, 그리고 그와 관련된 활동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변화는 크게 두 갈래로 진행됐다고 볼 수 있다. 하나는 여전히 소수이기는 하지만 ‘평화’라는 단어를 수식어가 아닌 독립어로 쓰는 개인이나 집단이 생겨나고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배경과 하는 일은 다양하다. 평화학 또는 평화갈등학을 공부한 사람들, 평화교육과 갈등해결교육에 전념하는 개인이나 집단, 평화를 주요 주제로 삼는 시민사회 단체들, 그리고 평화연구에 관심을 보이는 개인이나 대학 연구소들도 생겨났다. 학문 분야에서는 평화학 전공자들이 극히 드문 관계로 정식 연구 분야로 자리 잡지 못하고 극히 제한적인 접근만 이뤄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수하게 평화학과 평화에 관련된 주제에 관심을 보이는 개인 연구자와 단체들이 등장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과거처럼 ‘평화’를 ‘통일’과 관련지우지 않고 독립적인 의미와 가치를 가진 단어로 쓰면서 ‘평화’에 대한 보편적인 접근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의 변화는 ‘평화’의 남용과 오용이다. 1990년대 말, 또는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평화’라는 단어는 많이 쓰이지 않았다. 제한적인 사용 중 대부분이 ‘통일’을 수식하는 역할, 다시 말해 설명하는 역할을 했다. ‘평화 통일’이라는 쓰임이 그 대표적인 예다. 여기에서 평화는 ‘평화적’ 통일을 의미하는 수식어 역할을 하거나 ‘평화’를 염두에 두고 ‘통일’을 얘기해야 한다는 것을 설명하는 역할을 했다. 그 당시만 해도 평화는 통일에 대한 진보적인 생각을 대변하는 단어처럼 이해됐다. 그러다가 9.11 이후 세계적으로 아프간 전쟁과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는 평화운동이 확산되면서 한국사회도 보편적인 개념의 평화를 생각하게 됐다. 이를 계기로 많은 사람들이 ‘평화’가 21세기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와 가치를 가지는 단어 중 하나라는 점에 동의하게 됐다. ‘평화’는 비주류 소수자들의 단어에서 대중적인 단어로 변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겼다. 새로운 것을 지나치게 좋아하는 한국 사람들의 성향 때문인지, 아니면 정신없이 돌아가는 산업사회의 압박에 지친 때문인지 ‘평화’에 대한 오해가 생겨났다. 많은 사람들이 ‘평화’를 긍정적으로 이해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편안함이나 나른함의 상태, 또는 그것을 추구하는 것으로 오해했다. 이런 오해와 함께 평화에 대한 ‘낭만적’인 접근을 취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이들은 삶의 모든 번거로움에서 벗어나 느림과 초연함을 추구하는 것을 ‘평화’를 추구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물론 이것도 개인적인 차원의 평화라고 볼 수는 있다. 그러나 폭력의 종식, 구조적 문제의 해결, 평등한 관계의 수립, 평화문화의 형성이 가져온 결과가 아닌 개인적인 차원에서 문제의 회피나 부인으로 얻어지는 이런 편안한 생활은 진정한 ‘평화’와는 거리가 멀다.
‘평화’의 대중화와 오해가 가져온 결과는 ‘평화’의 남용과 오용이다. 단체나 연구소의 이름에 ‘평화’를 수식어처럼 붙인 경우들이 생겨났고 ‘평화’를 관심 주제로 내세우는 단체나 연구소도 많아졌다. 그런데 막상 속을 들어다보면 예전의 통일, 국제 관계, 안보 등의 주제에 평화라는 단어만 첨가한 경우가 많고 이름에 ‘평화’를 붙였지만 하는 일은 ‘평화’와 전혀 상관이 없는 경우가 흔하다. 이것은 세계적으로 평화가 시대적 주제 중 하나로 떠오르고 한국사회에서도 평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자 생겨난 ‘평화’의 남용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위에서 말한 것처럼 ‘평화’를 뭔가 말랑말랑하고 나른한 것으로 오해함으로써 편안한 삶을 추구하는 모든 일에 ‘평화’를 수식어로 붙이는 오용이 많아졌다. 어떤 식으로든 ‘평화’를 추구하기 때문에 그것 모두를 남용이나 오용으로 판단할 수 없다는 주장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평화‘의 남용과 오용이라는 가장 단적인 증거는 그것들 모두가 ’폭력‘에 대한 성찰과 분석이 없다는 것이다. ’평화‘는 불가피하게 ’폭력‘을 대면해야 한다. 세상에 만연된 폭력을 없애지 않고는 평화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에서 ‘평화’는 과도기를 겪고 있다. ‘평화’가 긍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게 된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그러나 ‘평화’가 추상적이거나 모호하게 이해되고 그에 따라 ‘평화’를 위한 노력이 어긋난 방향으로 가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물론 과도기가 지나면 ‘평화’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와 접근이 이뤄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저절로 일어나지 않으며 설사 그렇다 할지라도 그대로 두고 보는 것은 올바른 접근이 아니다.
이 글에서 얘기하려고 하는 것은 ‘평화’에 대한 보편적인 이해와 그런 보편적 이해에 기초한 ‘평화’ 노력의 모색이다. 물론 그 초점은 한국교회의 노력에 맞춰져 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그동안 한국교회가 해온 평화운동에 대해 평화연구의 관점에서 성찰해 보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또한 한국교회가 ‘평화’를 중요한 이 시대의 가치와 철학으로 인정하고 나아가 ‘평화’를 성취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모색해 보는 것이 이 글의 또 다른 목적이다. 이 짧은 글에서 얼마나 많은 얘기를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관심 있는 사람들과 함께 고민해 볼 기회는 가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한국교회와 평화: 이해와 접근의 한계
평화는 폭력과 함께 이해된다. 평화를 깨는 것이 폭력이고 세상의 다양한 폭력을 없애지 않고는 평화가 성취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모순적이게도 평화는 폭력을 잘 분석함으로써 가장 잘 이해하고 없앨 수 있다. 어떤 폭력이 왜 일어나고 있는지 분석적으로 이해하지 않고는 폭력을 없앨 구체적인 전략과 방법을 고안해 실천할 수 없다. 이것은 폭력에 대한 이해가 모호하거나 제한적이면 평화에 대한 이해와 접근도 모호하거나 제한적일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한국교회가 이해하고 있는 폭력과 평화는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는 수준과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한국교회가 한국사회 안에 자리 잡고 있으므로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말로 한국교회가 한국사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폭력에 대해 넓고 깊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물론 폭력을 없애고 평화를 성취하는데도 별 역할을 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알고 있는 폭력은 직접적(direct) 폭력이다. 이것은 물리적인 힘을 이용해 신체에 가해지는 폭력의 형태로 나타난다. 가장 극단적인 예로 전쟁이나 범죄 등에 의한 살해, 상해, 감금 등이 있고 심한 언어폭력이나 심리적 압박 등도 직접적 폭력에 해당된다. 직접적 폭력은 현장에서 즉시 그 결과와 피해가 나타나기 때문에 모두가 가해자와 피해자를 알 수 있다. 다른 종류의 폭력인 구조적(structural) 폭력은 사회적 환경, 구조, 제도 등을 통해 가해지며 개인의 잠재력 발휘를 막는다. 다양한 사회운동에서 가장 많이 관심을 쏟는 폭력의 형태로 특정 개인이나 집단에 대한 차별, 억압, 통제, 착취, 평등한 기회 제한 등이 여기에 속한다. 낮은 임금, 낮은 교육 수준, 열악한 건강 상태 등을 가진 사람들이 주로 구조적 폭력의 피해를 입는다. 구조적 폭력은 주로 합법적인 수단에 의해 가해지기 때문에 피해자조차 가해자를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또한 즉각적으로 신체적 해를 가져오진 않지만 빈곤, 굶주린, 억압, 소외 등을 야기해 점진적으로 삶의 질을 낮추고 생명을 단축시킨다. 다음으로 가장 드러나지 않는 폭력은 문화적(cultural) 폭력이다. 이것은 종교, 사상, 예술, 과학 등을 매개로 이뤄지며 직접적, 구조적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용된다. 직접적, 구조적 폭력에 철학적, 사상적 토대를 제공해주고 두 가지 폭력에 계속적으로 영양분을 제공하는 역할도 한다. 성차별, 인종차별, 계급차별, 경제적 차별 등에 철학적, 사상적 토대를 제공하는 문화적 통념, 종교적 가르침, 자유 시장 이론, 개발지향 담론, 민족주의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문화적 폭력은 사회에서 상식처럼 여겨지기 때문에 사람들은 여기에 저항하는 것을 반사회적 행동으로 취급한다. 때문에 사람들은 문화적 폭력을 인식한다 해도 그것에 도전하거나 저항하는 것을 꺼린다.
사실 이 모든 폭력은 모두가 잘 알고 있는 것이고 사례 또한 많이 알려져 있다. 폭력이 문제가 되는 것은 평화를 해친다는 점 이전에 그것이 근본적으로 인간의 삶을 파괴하고 삶의 질을 저하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폭력을 이해하고 그것이 가져오는 피해에 민감해지는 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입는 폭력의 피해에 민감해지고 그들의 삶을 이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위에서 언급한 모든 폭력의 존재를 이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폭력에 대한 대응에서는 거시적 차원에 치우치는 제한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평화에 대한 한국교회의 이해와 접근 또한 거시적인 차원에 치우쳐 있다. 평화는 크게 소극적(negative) 평화와 적극적(positive) 평화로 구분한다. 소극적 평화는 직접적 폭력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소극적 평화는 반드시 부정적인 것은 아니며 적극적 평화로 가기 위한 디딤돌 역할을 하기도 한다. 단적인 예로 전쟁이 끝나야 평화로운 사회와 국가의 재건이 가능한 것과 같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평화적인 방법을 통해 직접적 폭력이 종식돼야 한다. 적극적 평화는 구조적, 문화적 폭력까지 사라진 상태를 말하며 부당한 사회 환경과 구조, 불평등한 관계, 그리고 의사결정 과정 참여 확대 등을 통해 이뤄진다. 그 결과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사회, 문화, 정치, 경제 발전의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된다. 이것은 모든 평화 노력의 궁극적 목표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이론적으로 정리된 평화에 대한 이해 또한 한국교회가 대체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평화 노력에 있어서 한국교회는 극히 제한적인 주제만을 선택하고 있다.
위에서 짧게 정리한 폭력과 평화에 대한 한국교회의 접근은 두 가지 점에서 제한적이다. 첫째는 주로 거시적인 문제에만 관심을 둔다는 점이고 둘째는 주제에 있어서 선택적으로 접근한다는 점이다. 한국교회가 지금까지 가장 관심을 가진 폭력은 국가에 의한 폭력이고 그에 따라 대응 방법도 거시적인 차원에 치우쳤다. 한반도의 불안한 평화, 부당한 사회 제도와 환경, 자유 시장 경제 논리 등이 한국교회가 관심을 가지고 다룬 폭력의 문제들이다. 이런 거시적인 폭력과 관련해 한국교회가 선택한 세부 주제들 또한 제한적이었다. 한반도 평화 문제는 통일 문제, 안보 담론 등과의 관련 속에서만 다뤘고 부당한 사회 제도와 환경, 그리고 자유 시장 경제 논리는 정부의 부당한 정책과의 관련만 강조했다. 그러나 이 모든 폭력의 다른 근본적인 문제라 할 수 있는 군대 및 군축, 시민 참여, 개인의 소비와 투자 문제 등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또 다른 근본적인 문제로 폭력이 개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기 사회 모든 영역에서 폭력 문화를 없애고 평화 문화를 만드는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거시적 차원의 폭력을 없애기 위해 사회 구성원들의 역량을 키우고 그들의 평화 노력을 독려하는 것에도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런 제한적이고 선택적인 접근 때문에 결과적으로 폭력에 대한 한국교회의 대응은 평화 성취에 구체적으로 기여하지 못하고 있다. 제한적인 접근이 가져온 또 다른 문제는 한국교회가 자신의 문제는 외면했다는 것이다. 거시적 차원의 폭력에만 관심을 두다보니 교회 안의 직접적, 구조적, 문화적 폭력을 성찰하고 없애려는 노력은 거의 하지 않았다. 그 결과 자신의 폭력에는 무관심 하면서 사회의 문제만 지적하는 균형을 잃은 태도를 보이게 됐다.
한국교회의 평화운동과 한계
한국의 평화운동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평화운동의 시작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시각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냉전이 종식된 1990년대 이후 태동되었다는 것에 동의한다. 어떤 사람들은 1990년대 중반 북한의 핵개발 문제에 대한 대응 속에서 평화운동이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들은 2003년 정부의 이라크 파병에 반대하면서 평화운동이 시작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기독교인들은 1980년대 후반 한국기독교회협의회를 중심으로 진보적인 교회들이 통일 담론에 평화를 결합시키면서 평화운동이 시작됐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여러 가지 주장이 있지만 한국의 평화운동은 2000년대 초반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9.11 테러에 대한 미국의 보복 성격이 짙었던 아프간 전쟁이 시작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전쟁 반대 운동이 일어났고 거기에 한국 시민사회도 적극 동참하면서 평화운동이 시작됐다. 미국이 시작한 전쟁이었기에 반미 성향이 강한 한국 시민사회가 더 큰 관심을 보였던 것으로 보인다. 곧이어 한국 정부의 이라크 파병 논의가 시작됐고 평화운동은 파병 반대 운동과 함께 확산됐다. 이때를 평화운동의 시작으로 보는 이유는 첫째, 이때의 전쟁 반대 운동이 민족주의적인 현안을 넘어 인류 보편적인 평화 현안을 다뤘기 때문이고 둘째, 전쟁이라는 주제를 상황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전쟁 그 자체에 대한 반대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이다. 물론 대부분의 시민단체들이 이라크 파병 반대에 큰 관심을 두기는 했지만 그와 함께 전쟁의 반인륜적 성격과 이라크 사람들의 고통을 전쟁 반대의 가장 큰 이유로 꼽았다. 이때의 전쟁 반대 운동과는 대조적으로 1990년대 중반 한반도 핵 반대 운동이나 1980년대부터 시작된 진보적 교회들의 평화통일 운동은 민족주의적 성격이 짙었고 세계의 보편적인 평화운동 이론이나 담론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보적 교회들의 평화통일 운동과 반핵 운동을 통한 사회적 경험과 자원이 2000년대 평화운동에 기초를 제공한 점은 높게 평가해야 한다.
한국의 평화운동은 시작 이후 별 진전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극소수를 제외하고 평화운동을 하고 있는 대부분의 개인과 단체는 여전히 한반도 문제에 매몰돼 있고 세계의 평화 현안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한국의 평화운동이 여전히 민족주의적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얘기한다. 세계의 평화운동은 2000년대 초반 다시 불붙은 반전 운동을 계기로 전쟁 반대를 다시 중요한 현안으로 삼고 있다. 그 외에도 세계 공동으로 직면하고 있는 다양한 구조적, 문화적 폭력을 제거하고 적극적 평화를 이루는 일에 집중하고 있다. 세계 평화운동이 국가의 경계를 넘은지는 이미 오래 됐고 운동가들은 세계 시민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폭력을 규명하고 평화를 이루는 일에 전념하고 있다. 한국의 평화운동은 운동 방법에 있어서도 극히 제한적이다. 운동의 내용은 여전히 발표, 집회, 세미나 등에 맞춰져 있다. 아주 소수의 단체를 제외하고는 보편적인 평화 담론에 기초해 세계의 현장에서 일하거나 평화운동의 역량을 키우기 위한 교육이나 훈련에는 거의 관심을 쏟지 않고 있다.
한국교회의 평화운동 또한 주제와 선택과 활동 내용 면에서 지극히 제한적이다. 한국교회의 평화운동이 여전히 통일 현안을 중심에 두고 있고 ‘평화’를 ‘통일’을 장식하는 보조적 주제로 취급한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진정한 평화운동으로 보기 힘든 점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논란이 있을 수 있는 문제이므로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기로 한다. 어쨌든 이런 점을 한국적 상황으로 인정한다 해도 한국교회의 평화운동은 시민사회의 평화운동보다도 더욱 제한적이다.
시민사회 평화운동은 자원의 한계 속에서도 세계 평화 현안에 대한 관심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한국교회 평화운동의 주요 관심은 여전히 통일에 쏠려 있고 민족주의적인 시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인류 보편적인 평화 현안에 대한 연구와 이해가 부족하고 거기에 별 관심조차 두지 않고 있다. 이것은 한국사회의 한계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지만 폭력에 맞서고 평화를 이뤄야 할 사명을 지닌 교회의 역할을 생각한다면 큰 모순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통일 문제에 너무 집중하다보니 국가 안보 담론의 틀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때문에 평화 담론이 아닌 안보 담론에 기초해 통일 현안을 다루는, 다시 말해 평화운동의 틀에서 벗어난 모순된 접근을 취하고 있다.
한국교회의 평화운동은 연대 차원에서 성명을 내거나 예배를 드리는 정도로 통일 문제 이외의 국내.외 평화 현안에 접근하는 상태에 머물러 있다. 국외적으로는 전쟁과 무장 분쟁, 기후변화와 생존 위기, 금융 위기와 빈곤, 소형 무기와 범죄 등 굵직한 세계의 평화 현안에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덧붙여 해외로 진출하는 한국 정부기관들과 기업들의 활동을 감시하고 이들에게 폭력을 야기하지 않는 윤리적 활동을 촉구하는 일도 외면하고 있다. 국내적으로는 사회갈등과 시민 참여의 문제, 경제 계층 사이의 단절과 갈등, 폭력문화의 확산 등 한국사회에 폭력을 야기하는 주요한 문제들을 다루지 못하고 있다. 이런 문제들은 통일 중심 평화운동을 통해서는 다룰 수 없는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한국교회 평화운동의 또 다른 한계는 평화적 방법에 대한 이해와 실천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 점은 통일 문제에 초점을 맞춘 평화운동이 평화운동의 원칙을 가지고 있느냐에 대한 질문을 다시 제기하게 한다. 평화운동은 평화적 방법을 통해, 즉 비폭력 행동을 통해 이뤄져야 한다. 여기서 비폭력 행동은 직접적 폭력은 물론 구조적, 문화적 폭력까지 거부하는 행동 원칙을 말한다. 이것은 또한 평화운동 내에서도 이런 모든 종류의 폭력을 제거해야 함을 의미한다. 물론 세계 평화운동에는 과격한 운동가들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모든 평화운동은 평화적 방법에 의한 운동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이런 원칙은 평화운동 내에서의 참여적 의사결정 방식, 평등한 관계, 소수 의견의 동등한 검토, 다양성의 인정 등에까지 적용된다. 한국교회 평화운동이 이런 점에까지 관심을 두고 있는지, 다만 실천만 부족한 것인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한국교회 평화운동의 가장 큰 한계는 자기 문제의 외면이다. 통일 문제에 집중하고 국가에 관련된 거시적 현안에만 관심을 두다보니 교회 내의 폭력 문제는 소홀히 다뤄왔다. 양성 평등이나 청년 문제 등 약자 집단에 대한 관심은 보여 왔지만 교회가 가지고 있는 많은 구조적, 문화적 폭력은 전통 또는 관습이라고 치부하며 외면해 왔다. 교회 안의 수직적 관계, 소수에 의한 일방적 의사결정, 평교인 참여 배제, 불투명한 관리, 소통 부재, 희생 강요 등에 의해 가해지는 구성원들에 대한 상처주기와 폭력은 마치 한국교회의 특징인 것처럼 인정되고 있다. 또 다른 층의 문제는 진보와 보수로 나눠진 교회의 단절과 대립이다. 한국교회 평화운동은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함으로써 공통의 담론이나 협력 현안을 개발하고 간극을 좁힐 노력을 거의 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평화운동은 이런 단절과 대립을 악화시키는 역할을 해왔으며 이 때문에 특정 입장을 가지지 않은 일반 신자들의 관계까지 단절시키는데 일조하고 있다.
평화운동의 한계 극복과 피스빌딩(peacebuilding)
한국교회의 평화운동이 앞에서 언급한 한계를 넘어서 진정한 평화운동으로 변화될 수 있으려면 운동의 외면보다는 내용을 채우는데 주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평화운동의 주제는 물론 방법에 있어서도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 그런 새로운 접근은 사실상 한국교회 평화운동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과 현재까지의 운동에 대한 자기비판으로부터 시작돼야 한다. 그러나 운동이라는 것이 보통 주체가 명료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결국 점진적으로 새로운 담론이 형성되고 그에 기초해 새로운 시도들이 이뤄져야 변화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어느 분야에서건 변화는 새로운 생각을 가진 적극적인 소수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한국교회 평화운동의 새로운 접근도 새로운 생각을 해보는 것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다. 그러므로 마지막으로 새로운 생각의 시작에 도움이 될 몇 가지를 언급해보려고 한다.
한국교회 평화운동의 첫 과제는 민족주의적 한계를 벗어나는 것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이것은 경계를 구분하지 않고 고통 받는 자들의 고통을 나누고 그들을 도와야 할 교회의 역할과 신앙 고백을 생각할 때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앞서 잠깐 언급한 것처럼 세계는 다양한 폭력에 직면해 있다. 전쟁과 범죄 등 직접적인 폭력뿐만 아니라 국제기관이나 정부들도 뚜렷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기후변화와 금융시장에 의한 구조적, 문화적 폭력은 많은 사람들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이런 문제들을 외면하고 한반도의 평화통일 문제에만 관심을 쏟는 것은 지나치게 민족주의적인 접근이다. 더군다나 경제 규모가 커지고 있는 한국이 세계의 폭력에 직.간접적으로 기여하고 있음을 생각한다면 전 세계의 폭력과 평화 문제에 관심을 쏟고 그 안에서 한반도 평화통일 문제에 대한 연대를 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다음으로 극복해야 할 한계는 교회 내 폭력에 대한 무관심 또는 그것의 묵인이다. 평화운동에 관여하는 개인이나 단체는 자신 안의 평화를 이루는 것을 우선적 일로 삼는다. 이것은 폭력과 평화에 대한 민감성, 수평적 인간관계, 평화문화, 참여적 의사결정, 평화적 갈등 해결 등을 통해 이뤄질 수 있다. 한국교회 내에는 다양한 직접적, 구조적, 문화적 폭력이 존재한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한국교회 평화운동은 지금까지 교회 안의 폭력 문제는 외면해 왔고 교회 내 폭력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언급하지 않았다. 평화운동이 평화통일 운동이 아닌 진정한 평화운동으로 변화되기 위해서는 교회 내의 평화를 이루려는 구체적인 노력이 있어야 한다. 덧붙여 교회의 단절을 극복하기 위한 진지한 노력도 이뤄져야 한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한국교회 평화운동은 진정한 평화는 평화적 방법에 의해 이뤄질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와 평화운동의 원칙에 대한 성찰이 부족하다. 평화적 방법에 대한 고민은 단순히 물리적 폭력을 사용하지 않음을 넘어서 대립이 아닌 대화와 협력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적극적으로 평화운동이 평화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도 포함한다. 평화운동에 관계된 사람들이 자기 것만을 주장하고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들과의 소통과 관계를 포기한다면 그것은 결국 관계의 단절과 조직, 공동체, 사회의 분열에 기여하고 나아가 폭력의 지속에 기여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러므로 폭력에 맞섬에 있어서 인간이 아닌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고 협력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여러 모로 고민해야 한다.
평화자원의 개발 또한 한국교회 평화운동이 거의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는 부분이다. 평화운동의 궁극적인 목표라 할 수 있는 적극적 평화는 평화 노력의 지속성이 담보되지 않으면 성취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평화자원을 만들고 발전시켜가야 하는 것은 평화운동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다. 평화는 소수의 개인이나 단체에 의해서가 아니라 조직, 공동체, 사회의 구성원 전체가 함께 노력할 때 이뤄질 수 있기 때문이다. 평화자원은 다양한 영역에 속한 사람들과 접촉하고, 그들이 폭력과 평화의 문제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우며, 그들과 함께 당면한 문제를 규명하고 대응할 때 점진적으로 형성되고 확대될 수 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평화교육이다. 폭력과 평화에 대한 민감성을 키우고 사람들의 가치, 태도, 행동을 변화시킬 수 있도록 평화교육은 다양한 집단을 대상으로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한국교회 평화운동은 목표지향적인 운동적 접근을 넘어 평화를 이루기 위한 과정과 노력에 초점을 맞추는 피스빌딩 접근을 보강해야 한다. 운동은 그것을 주도하는 개인 또는 단체가 주장하는 입장에 기초해 목표를 설정하고 추구하는 성향이 강하다.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목표는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지만 사회 구성원들의 참여는 미미하고 현안의 결정과 해석은 일방적으로 이뤄진다. 한국교회 평화운동도 이런 방식에 기초해 과정보다 목표에 초점을 맞춘 방식을 취해왔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폭력의 평화적 전환을 위해 다양한 사회 계층 사이의 평등한 관계, 그리고 공정한 사회 환경과 구조를 만드는 노력을 일컫는 피스빌딩은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므로 피스빌딩 접근은 사회 각 영역에 있는 개인 및 집단을 모으고, 그들과 함께 문제를 규명하며, 달성할 목표를 설정한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구체적인 활동을 구상하는데 있어서도 되도록 다양한 개인 및 집단을 참여시켜 그들과 함께 구체적인 방법과 행동을 모색하고 실천한다. 운동이 현안을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경직된 접근을 취하는 반면 피스빌딩은 아래로부터 수집된 구체적인 정보에 기초해 위로부터의 폭력을 없애는 방법을 모색한다. 또한 평화를 이루기 위한 과정 자체가 평화적인 과정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한다. 이런 방식은 평화에 대한 비슷한 생각과 비전을 가진 다양한 개인들 및 단체들과의 네트워킹과 협력을 통해 이뤄질 수 있다. 또한 평화운동을 하는 조직, 단체, 공동체 내의 수평적 문화와 참여적 의사결정, 그리고 이런 방식을 담보하는 조직 내의 평화문화 형성에 의해 보장될 수 있다.
한국교회의 평화운동은 한국사회의 평화운동이 그렇듯 그리 길지 않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자기 성찰과 비판을 통해 계속적으로 내용을 보강하고 변화를 모색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만 그 과정에서 엄격한 평화적 원칙과 방법에 의존하고 다양한 개인 및 집단의 목소리와 구체적 요구에 기초해 평화운동의 내용, 방향, 활동을 채워나가는 번거로움을 마다 않기를 바랄 뿐이다.
위의 글은 개신교 잡지인 <농촌과 목회> 2011년 가을호에 실린 글입니다. 무단 복사와 배포를 할 수 없으며 인용할 때는 출처와 저자를 밝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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