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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덕 주민투표, 갈등 예고편의 완성평화갈등 이야기 /갈등해결 2015. 11. 13. 17:28
'법적 효력 없음'?
원자력발전소(어떤 사람들은 핵발전소라고 부르지만) 유치 찬반을 묻는 주민투표가 영덕에서 실시됐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결과는 32.5% 투표율로 무효다. 주민투표법에 따라 인정을 받으려면 전체 유권자의 3분의 1 이상이 참여해야 한다는데 거기에 미치지 못했다. 사실 이번 주민투표 자체가 법적으로 인정된 것이 아니었으니 3분의 1 이상이 참여했어도 아무런 법적 효력은 없다. 그래서 정부는 투표 자체를 '인정할 수 없다'고 발표했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법적 효력은 없어도 그만큼의 주민들이 법적 효력도 없는 투표에 참여했고 자신의 의사를 표명했다는 사실이다.
산자부는 영덕군 의회에서 결의해 원전 유치를 신청했으니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법적 효력도 없는 주민투표가, 그것도 3분의 1의 투표율에도 미치지 못한 주민투표가 그 결정을 뒤집을 수 없다고 말한다. 주민들도 원전 유치가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다는 것을, 그리고 주민투표가 '법적 효력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주민투표를 준비하고 투표를 했다. 왜 그랬을까? 군의원들이 자신들의 의견을 물어 유치 결정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더 근본적으로 산자부와 한수원이 자신들의 의견은 묻지 않고 군과 군의회만 상대해 원전 건설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원전이 건설되면 그곳에 사는 사람들 모두의 삶에 영향이 미치는데도 말이다. 그러니 설사 법적으로 효력이 없다 할지라도 자신들의 생각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또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것도 주민투표라는 아주 의젓하고 젠틀한 방식으로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법적 효력 없음'은 사실 공허한 말이고 주민들은 그 말을 들으면서 오히려 산자부와 한수원이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갈등 예고편의 완성
원전을 둘러싸고 갈등이 생기는 것은 전 세계적으로 흔한 일이다. 원전은 가장 민감한 안전문제를 내포한, 그리고 첨단과학의 집성체이면서도 과학적 불확실성을 가장 많이 내포한 시설이기 때문에 강한 문제 제기와 심한 반대가 생기곤 한다. 첨단과학이 인간의 손이 미치지 않는 자연재해는 물론 시스템을 통해 완전히 통제할 수 없는 인재까지 해결해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이런 원전 문제는 몇년 전까지만 해도 가치와 신념의 문제로 취급됐다. 그래서 환경과 안전에 관심을 가진 일부 시민들과 단체들만이 문제를 제기하곤 했다. 그러나 이제는 원전 문제가 가장 민감한 안전 문제를 동반한 삶의 문제이자 상식이 됐다. 사실 몇년 전만해도 삼척, 부산, 영덕 등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원전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낼 것이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정부 정책에 거의 반대를 하지 않고 살아온 사람들이 말이다. 그런데 이제는 달라졌다. 이웃 나라 일본에서 쓰나미 이후 끔찍한 원전사고가 난 것을 간접적으로 경험했고, 그렇게 관심이 높아진 가운데 각종 원전 비리와 오작동이 빈번한 현실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문제 의식이 생긴 것이고 되돌릴 수 없는 상황의 변화가 생긴 것이다
원전의 안전 문제를 지적하는 평범한 시민들에게 법적으로 유효하다거나 유효하지 않다거나 하는 말은 설득력이 없다. 그들이 준법정신이 없어서가 아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식으로든 자신들의 생각을 결정권을 가진 사람들에게 알리고 그들에게 결정을 재고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미 시간, 에너지, 재원을 투자해 문제에 맞설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런데 거기에 정부는 '법적 효력 없음'이라는 너무나 단순한 답을 했다. 그러니 유감스럽게도 갈등의 예고편은 완성된 셈이다. 사실 정부도 한수원도 주민투표에 신경이 쓰였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법적 효력도 없는 주민투표에 그렇게 관심을 쏟고 투표 결과가 나오자마자 장관이 나서서 기자회견까지 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그 관심이 순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대응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 기자회견에서 덧붙인 "일부 반대하는 주민들이 있다는 것을 겸허하게 받아들인다"는 말은 예전보다는 나아진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적으로 문제가 없으니 원전을 짓겠다'는 말은 주민들 편에서는 들으나마나한 얘기다.
이제 갈등의 예고편은 완성됐으니 본편이 어떻게 진행될지 우려스럽다. 지금까지는 주민투표라는 아주 젠틀한 방식이 선택됐지만 앞으론 어떤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다. 아니, 사실은 대충 예상이 된다. 작은 대한민국 땅에서 또 다른 '전선'이 형성될 가능성이 아주 높다. 정부와 한수원이 '법적 하자 없음'만 읊조리면서 계속 밀어붙이면 말이다.
사실 '법적 효력 없음'은 갈등에서 유효한 말이 아니다. 갈등이 법의 테두리 안에서만 생긴다면 우리나라를 비롯한 민주사회에서 사회 갈등이 생길 이유가 없다. 아무리 법적 제한이 있어도 법에 조금이라도 허점이 있어서 개인과 집단의 이익과 권리가 보장되지 않으면 사람들은 문제를 제기한다. 그러면 갈등이 생기고 정부, 공공기관, 사업기관 등은 거기에 대응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최선의 방법은 '법적 효력 없음'이나 '법적 하자 없음' 등의 공허한 말이 아니라 갈등을 감수할 준비가 된 사람들을 직접 대면하는 것이다. 자기 집 옆에 위험 시설이 들어서는 것을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어쩔 수 없다'거나 '사회를 위해 누군가 희생해야 한다'는 등의 말로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목소리를 진지하게 듣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갈등의 본편을 마주할 준비를 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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