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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방지법, 먹는 거야?평화갈등 이야기 /평화 2015. 3. 12. 00:00
미 대사 피습 (혹은 '테러'로 규정되는) 뉴스를 듣고난 후, 그리고 당사자의 안전이 확인된 이후 가장 신경이 쓰였던 것은 사건이 몰고 올 정치적, 사회적 파장이었다. 내 주변의 많은 사람들 또한 그랬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비슷한 상황이 반복됐기 때문에 제대로 기억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가질 수 있는 자연스런 우려였다.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는 유행가 가사처럼 파장은 컸고 그중 하나는 여당의 테러방지법 제정 주장으로 나타났다. 여당은 미 대사 피습을 '테러'로 규정하고 그런 일의 재발을 막기 위해 테러방지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IS와 같은 테러집단 가담자 발생으로 한국이 테러에 노출돼 있기 때문에 테러방지법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뭐 아예 틀린 말은 아니다. 우리가 북미나 서유럽 국가들이 겪고 있는 정치적, 종교적 주장을 내세운 테러에서 완전히 자유롭다고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만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미 대사 피습 사건을 테러방지법 제정의 계기 또는 근거로 삼을 수 있는지, 그리고 테러방지법 제정으로 어떤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좀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한 마디로 좀 따져봐야 한다는 얘기다.
따져보기 위해서 우선 테러의 의미부터 생각해보자. 우리사회에서 '테러'는 신속한 생성과 사멸의 특징을 가진 유행어의 하나처럼 쓰여지고 있는 측면이 있다. 그래서 초딩도 중딩도, 그리고 유행에 뒤쳐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쫌 감각있다는 성인들도 주변에서 일어나는 공격적 행동을 '테러'라고 부르곤 한다. '테러'라 명명함으로써 '반사회적' 또는 '비상식적' 행동이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친구 사이에 농담처럼 던지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한 마디로 '테러'가 왜곡되고 있다. 현재 상황은 그런 유행에 여당이 슬며시 끼어들어 공식 메뉴 하나를 만들어보려고 애쓰는 모양새다. 여당이 쓰는 '테러'라는 말도 본래 의미를 왜곡해 쓰이는 유행어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 같다. 아마 본심을 숨기기 위해 일부러 애매모호하게 '테러'라는 말을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왜곡에 왜곡을 더해 본질을 흐리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치적 상황을 만들어보려는 의도를 숨기기 위해서 말이다. 뭐 무엇이 진심인지는 알 수 없다.
테러(terror)는 보통 테러리즘(terrorism)과 함께 쓰이는 단어다. 언어적 의미로 테러는 물리적 폭력을 이용해 누군가에게 해를 입히거나 공포에 빠뜨리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전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테러의 의미는 테러리즘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때문에 단순하게 해를 입히거나 공포를 조성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나 단체가 정치적, 종교적, 사상적 목적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민간인(비전투원)에게 물리적 폭력을 가하거나 물리적 폭력의 위협을 가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때 시민에 대한 폭력은 무차별적으로, 다시 말해 아무 관련이 없는 무고한 시민에게 폭력이 가해지는 것이 보통이다. 테러 행위는 보통 위법적인 개인이나 단체, 또는 비국가 단체에 의해 저질러지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사전적 정의에는 국가에 의한 테러도 포함돼 있다.
자 그럼 일반적 정의에 따라 미 대사 피습 사건을 생각해보자. 한 마디로 그것이 테러 행위인지는 해석의 여지가 있다. 먼저 공격을 저지른 사람이 정치적, 종교적, 또는 사상적 목적을 가지고 있었느냐를 따져야 하는데 범인이 얘기한 것을 보면 그 조건은 충족되는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미 대사를 군인이나 전투원이 아닌 민간인으로 규정할 수 있느냐다. 그가 군인이 아니므로 민간인인 것은 맞다. 그렇지만 그는 일반인이 아니라 정치인이고, 그것도 미국 대사다. 정치인은 항상 공격의 표적이 된다. 그것이 언어 공격이냐, 달걀 세례냐, 흉기를 사용한 공격이냐 등이 다를 뿐이다. 그런 이유로 고위 정치인들은 경호의 대상이 되곤 한다. 그러므로 엄격하게 따지면 그는 민간인으로 볼 수 없다. 다음으로 범인이 관계 없는 다수 시민에게 무차별 공격을 가했느냐의 여부인데 그건 확실히 아니다. 특정 사건을 테러로 규정할 때 흔히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적 폭력, 다시 말해 정치적 목적을 위해 직접적 책임이나 관련이 없는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적 폭력이 있고 그에 따른 희생이 있었느냐를 따지는데 거기에 맞지 않는다는 얘기다. 이와는 다르게 몇달 전 있었던 '황산 테러'는 그야말로 테러다. 특정 사상적,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무차별적으로 직접 관련이 없는 다수의 민간인을 겨냥하고 공포를 조성하려 했기 때문이다. 결국 따져보면 미 대사 피습 사건은 테러방지법 제정의 근거로 삼기에는 조건이 많이 부족하다. 엄격히 말하면 별 관계가 없다.
테러방지법 제정의 목적을 따져보면 더 설득력이 없다. 국가가 테러를 예방하고 테러범을 색출해야 하는 이유는 한 마디로 민간인을 보호해야 하기 때문이다. 테러가 테러가 되는 이유는 무고한 민간인이 무차별적으로 범죄의 표적이 되고 희생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테러방지법 제정 주장은 애꿎은 민간인이 해를 입지 않도록 보호해야 할 절실한 필요가 제기됐을 때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미안한 얘기지만 기본적으로 정치인이나 고위직 공무원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란 얘기다. 그 사람들은 무차별 공격의 대상이 될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고 이미 특별하게 보호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재 테러방지법 제정 주장이 나오면서 가장 크게 우려되고 있는 문제는 인권 침해 소지가 크다는 것이다. 테러 가능성을 가진 개인이나 단체를 감시 관리하고, 정보를 수집하고, 영장없이 체포해 몇날 며칠 조사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법이 제정되면 법을 집행하는 국정원의 권한이 커지는데 이미 정치적 편향성이 증명됐고, 그럼에도 개혁도 하지 않은 국정원에게 그런 권한까지 얹어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인권 침해 사례가 오히려 증가하고 있는 현재 우리사회 상황에서 시민을 보호한답시고 만든 법이 오히려 시민의 인권을 침해하는 법이 될 수 있단 얘긴데 이 자체가 큰 모순이다. 때문에 설사 다른 나라들처럼 시민에 대한 무차별적 공격이 이뤄지는 테러가 있더라도 우리의 정치, 사회 상황을 고려해 심사숙고해야 한다. 그런데 근거도 빈약한 서건을 핑계로 향후 국민들의 생활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 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니 그 의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고 진짜 속내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하긴 "미 대사를 공격한 요주의 인물이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고 있다"거나 "종북세력에 대한 관리를 철저히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면서 테러방지법 제정을 주장하는 의원들을 보면 그 속내가 대충 짐작은 가지만 말이다.
여당이 적극 밀어보려고 하는 테러방지법에 대해 논의하려면 테러에 대한 정의, 한국적 상황, 필요성 여부, 다른 법들과의 충돌 여부, 인권 침해 가능성 등등을 먼저 생각해야 하고 정말 필요한지 국민들의 생각도 물어야 한다. 테러방지법은 회전초밥집에서 그날 분위기와 입맛에 맞는 초밥 고르듯 계류 중인 여러 법안에서 상황에 대충 맞는 법 하나 고르는 일이 아니다. 국민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법을 입법권이 주어졌다해서 그렇게 기분파처럼 하나 골라 정치 담론을 형성하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치적 환경을 만들어보겠다는 식의 접근은 정말 봐주기 힘들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정치적 성향에 상관없이 상식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가 그 속내를 대충은 읽고 있다는 것이다. 미 대사 피습 사건으로 잠시 정신이 혼미해져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하는 일부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대다수의 국민들은 정치적 성향과 상관없이 미 대사 피습 사건이 테러방지법 제정의 필요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사건이란 것을 안다. 그래서 여당의 주장이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나처럼 민감하게 반응해 몇 자 끄적이는 사람도 있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미지 광고도 하는 시대에 괜히 이미지 구기지 말고 이제 대충하고 덮는게 좋을 것 같다. 대신 국민 생활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다른 많은 중요한 법안들에 관심 좀 가져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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