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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공존의 세계: 선진국의 구호개발 지원 축소평화갈등 이야기 /국제평화 2025. 3. 5. 09:49
지난 2월 27일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미국 국제개발국(USAID/US Agency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 직원들은 사무실에 잠깐 출입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 이들은 허락된 15분 동안 사무실을 정리하고 박스에 개인 소지품을 챙겨 오래된 직장을 떠났다. 이들은 세계 곳곳에서 해고된 직원 수천 명 중 일부였다. 트럼프 대통령의 명령을 받은 세계 최고의 갑부 일론 머스크는 미국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6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USAID를 식물상태로 만드는 결정을 했다. USAID,의 모든 사업을 일시적으로 중단시키고 점검을 한 미국 정부는 결국 92%의 사업을 없애고 4,100개 사업을 축소하기로 결정했다. 미 국무부는 이로써 약 600억 달러(약 87조 원)를 절약하게 됐다고 밝혔다. 미 국무부는 USAID 지원 중단이 결정된 사업들에 “귀 사업이 USAID 업무의 우선순위가 아니고 프로그램을 계속하는 것이 미국의 국가 이익에 맞지 않는다는 결정을 내렸다”는 통지를 보냈다. 이런 미국 정부의 결정은 전 세계 구호개발 지원 사업을 극심한 혼란에 빠뜨렸다. 혼란을 넘어 미국의 갑작스런 지원 중단으로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당장 식량과 의료 지원을 받지 못해 목숨을 잃을 상황에 직면했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구호개발 지원을 하는 국가였다. 2024년의 경우 미국의 지원은 전 세계 지원의 40%를 차지했다. 그다음 많은 지원을 한 국가는 독일, 프랑스, 일본, 영국 순이었다. 가장 큰 지원국인 미국이 갑자기 90% 이상의 지원을 중단하겠다고, 그것도 즉시 중단하겠다고 결정했으니 세계 곳곳에서 생존의 위협에 처한 사람들과 그들을 지원하는 사업들은 공황상태에 빠졌다. 현지에서 사업을 실행 또는 지원하던 수많은 USAID 직원들도 하루아침에 짐을 싸 떠나야 했다. 이런 결정은 미국이 지난 수십 년 동안 세계 곳곳에서 생존의 위협에 처한 사람들에게 막대한 지원을 해왔던 점을 생각하면 매우 무책임한 일이다. 지원 사업은 갑작스런 중단이 아니라 상황의 변화에 따라 점진적으로 이뤄져야 하고 부득이하게 중단해야 한다면 사업 실행자들과 수혜자들에게 적어도 준비하고 다른 지원을 알아볼 시간을 주어야 한다. 그러나 트럼프 정부는 그런 일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미국이 선의를 가지고 그동안 전 세계에 많은 지원을 한 건 칭송받을만한 일이고 자국의 이익을 위해 지원 중단 결정을 한 건 원칙적으로 비난할 수 없다. 그러나 지원이 많은 사람의 생존과 관련된 일이므로 신중하고 책임감 있는 결정이 이뤄졌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게 큰 문제다. 또한 한 가지 짚어야 할 건 미국이 온전히 인도주의 정신만으로 그동안 막대한 지원을 한 건 아니라는 점이다. 인도주의에 입각한 구호개발 지원에는 당연히 세계 곳곳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유지하고 때로는 미국의 외교적, 군사적 정책 및 개입의 정당성을 홍보하기 위한 목적이 동반되었다. 예를 들어 미국은 이스라엘에 막대한 무기 지원을 하면서 다른 한편 팔레스타인 난민에게도 막대한 지원을 해왔다. 심지어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공격하는 데 무기를 대면서 다른 한편으로 (결국 실패했지만) 가자지구 주민들에게 구호물자를 전달하기 위해 가자지구에 임시 항구를 건설하기도 했다. 이는 전범 국가인 일본이 막대한 구호개발 지원을 통해 국제사회에서 영향력을 키워온 것과 비슷하다. 구호개발 지원은 미국의 농산물 등의 소비에도 큰 역할을 해왔다. 이런 이유 때문에 지원 중단으로 앞으로 미국 농민들이 어려움을 겪을 것이란 전망도 나오고 있다. 다시 말해 수혜자들에 대한 연민과 인도주의 정신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USAID를 통한 미국의 지원은 기본적으로 국익을 위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트럼프 정부는 그런 지원이 국익에 맞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지만 말이다.
지난 2월 28일 안토니오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미국의 결정이 전 세계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수십 년 동안 미국이 인도주의 지원에 있어 “지도적 역할”을 해왔다며 미국의 지원으로 유엔을 통해 해마다 전 세계 1억 명이 지원을 받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미국이 사람의 생명을 구한 것에 더해 세계 평화와 안전을 증진하는 데도 기여했다고 강조하며 미국에 결정을 재고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미국의 결정은 돌이킬 수 없게 됐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다. 유엔은 당장 아프가니스탄, 시리아, 우크라이나, 남수단, 수단 등의 난민과 주민이 위험한 상황에 빠질 것이라고 말했다. 한 예로 USAID는 내전을 겪고 있는 수단에 가장 많은 지원을 해왔는데 지원 중단으로 1천 개에 달하는 식사 제공 키친은 문을 닫게 됐고 그곳 주민은 당장 생존의 위기에 처하게 됐다. 유감스럽게도 이는 수많은 사례의 하나에 불과하다.
한편 지난 2월 26일 영국의 스타머 총리는 현재 GDP의 2.3%인 국방예산을 2027년까지 2.6%로 늘리겠다며 이를 충당하기 위해 해외 구호개발 지원 예산을 줄이겠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현재 GDP의 0.5%를 차지하는 해외 구호개발 지원을 2027년까지 0.3%로 줄이겠다고 했다. 국방비 증액 발표는 미국 방문 및 트럼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앞둔 시점에 나왔다. 우크라이나 방어와 자체 안보를 위해 유럽 국가들에게 국방비 증액을 요구해온 트럼프와 미국 정부는 이 발표를 환영했다. 당연히 구호개발 단체들은 이를 맹렬히 비난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영국의 지원 중단 내지 축소 결정은 미국의 경우처럼 갑작스럽게 이뤄지지는 않을 것이고 수혜자들과 사업 실행자들에게 준비할 시간을 줄 것이란 점이다.
구호개발 지원을 중단 내지 축소한다는 미국과 영국의 결정은 ‘공존’의 세계가 흔들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외교를 통해서든 무력을 통해서든 ‘대결’ 정서와 태도는 강화되고 있다. 구호개발 지원 축소와는 대조적으로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세계의 무기 거래는 급증했다. 특히 유럽 국가들의 무기 수입과 무력 강화가 두드러졌다. 이 가운데 가장 큰 수혜를 본 건 미국과 독일이었다. 두 국가 모두 2023년에 사상 최고의 무기 수출액을 기록했다. 최종 결과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유엔의 무기 거래 목록을 검토한 결과 2024년의 세계 무기 거래 규모가 냉전 종식 이후 최대였다는 예비 조사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공존’을 위한 구호개발 예산을 획기적으로 삭감했고, 영국은 구호개발 예산을 줄이고 대신 국방예산을 늘리겠다는 결정을 했다. 세계 및 국내 경제 상황이 좋지 않기 때문에 한 곳의 예산을 늘리면 다른 곳의 예산은 줄일 수밖에 없는 현실적인 문제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가장 가난하고, 심지어 당장 굶주림과 질병으로 생존의 위험에 처한 사람들을 외면하고 이뤄진다는 점이 현재 우리가 사는 세계의 유감스런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실제 유럽연합 국가들의 국방예산은 계속 증가하고 있다. 2023년에는 전년보다 10%, 2024년에는 전년보다 11.7% 증가했고 이로써 10년 연속 증가를 기록했다. 반면 많은 유럽연합 국가들의 구호개발 예산은 계속 줄고 있다. 국방예산 증가와 구호개발 지원 예산 감소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는 증거는 없지만 어쨌든 현실은 무기 투자는 늘고 인도주의 투자는 감소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전쟁이 늘어나고 난민과 이주민이 해마다 증가하고 있는 상황에서 말이다.
문제는 무기와 이를 이용한 대결이 안전과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크라이나 국민의 안전과 행복은 우선 전쟁을 끝내야 가능하고, 유럽 국가들의 안전과 행복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끝내고 러시아와 관계를 정상화해야 가능하다. 이스라엘, 그리고 중동 국가들의 안전 또한 미국의 막대한 무기 지원과 이스라엘의 무력 강화와 대결이 아니라 팔레스타인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 그를 위한 대화와 협상을 통해 가능하다. 세계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는 내전도 마찬가지다. 일단 전쟁이 끝나야 안전하고 행복한 삶이 가능하다. 나아가 ‘공존’의 필요성을 인정해야 가능하다. 그러나 세계는 우크라이나 전쟁, 가자지구 전쟁 등 굵직한 전쟁을 겪으면서 매우 유감스럽게도 대화와 협상을 통한 공존의 모색보다는 배제와 공격을 통한 대결로 더욱 기울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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