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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과 공존의 필요카테고리 없음 2022. 8. 19. 10:31
사라지지 않는 빈곤
지난 3월 KBS대구방송총국의 보도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보도를 기획한 기자는 폐지수집 노인들의 강도 높은 노동을 증명하기 위해 리어카에 GPS(위치정보시스템) 장치를 달았다. 그리곤 지난해 12월 말부터 3주 동안 폐지수집 노인들을 동행 취재했다. 이를 통해 설득력 있는 정보를 얻을 수 있었고 그 결과를 보도했다.
GPS 추적 결과에 따르면 폐지수집 노인 10명의 하루 평균 노동시간은 11시간 20분이었다. 이들은 13km 정도의 거리를 매일 이른 새벽이나 자정 즈음에 리어카를 끌며 걸었다. 폐지를 조금이라도 더 모으기 위해 끼니를 거르는 게 보통이었고, 가까운 고물상을 두고도 조금이라도 값을 더 쳐주는 멀리 있는 고물상까지 가곤 했다. 그렇게 번 돈을 시급으로 환산하니 948원이었다. 이것은 2022년 시간당 최저임금(9,160원)의 10분의 1 수준에 불과한 것이었다. 노인들은 자신이 하루에 얼마를 이동하는지, 다시 말해 얼마나 강도 높은 노동을 하는지도 몰랐다. 6-7시간 정도 걷는다고 답한 노인도 있었다고 한다.
폐지수집 노인들이 노동 강도와 시간에 비해 형편없는 수입을 손에 쥐는 이유는 단순히 폐지수집이 원래 돈이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 아니다. 작년에 코로나19로 택배 물량이 급증하면서 종이상자를 만드는 데 쓰이는 폐지 가격은 30% 이상 올랐다. 제지기업들의 영업이익은 두 배로 껑충 뛰었다. 그러나 폐지수입 노인들이 손에 쥐는 돈은 그대로였다. 폐지수집상-압축상-제지기업으로 이어지는 유통과 이익 구조의 최하위에 자리하고 있는 노인들에게는 수용 급증의 이익이 조금도 돌아가지 않았다.
폐지 유통 업체들은 제지기업이 폐지 매입가격을 주먹구구식으로 정하거나 도매가격을 후려치기 때문에 인상된 가격으로 노인들이 가져오는 폐지를 사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제지기업들은 국내 폐지가 물에 젖어 있거나 이물질이 많아 수입 폐지에 비해 질이 너무 떨어지고, 그래서 가격을 높게 쳐줄 수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런저런 주장이 있지만 어쨌든 제지기업들은 이전 해보다 120%에서 많게는 900% 이상 영업이익이 증가했다. 수요가 많으니 폐지 수집상이나 압축상들의 이익도 당연히 이전보다는 증가했을 것이다. 그런데 폐지를 수집하는 노인들의 이익만 증가하지 않았다. 이익 구조의 맨 아래 자리하고 있고, 제대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힘없는 노인들만 이익 구조에서 배제됐다.
노인 빈곤에 대해 자주 언급하는 정부조차 극빈층인 폐지수집 노인들의 노동 및 수입과 관련한 적극적인 대책이 없었다. 정부는 폐지수집 노인 숫자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결국 열심히 일하는 폐지수집 노인의 수입이 조금도 늘지 않았던 건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물론 폐지 가격이 조금 오른다고 폐지수집 노인들의 빈곤이 해결되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이 사례는 열심히 일해도 빈곤을 벗어날 수 없는 우리 사회 빈곤층의 문제를 잘 말해준다. 사실 청년들도, 중년층도 똑같은 문제에 직면해 있다.
빈곤은 산업화가 최고조에 도달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부의 창출이 가능해진 지금도 가장 큰 사회 문제 중 하나다. 오히려 코로나19를 겪으면서 빈곤 인구가 늘었고,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세계 물가의 상승으로 앞으로 더 늘어날 전망이다. 유엔은 지난 6월 8일 ‘우크라이나 전쟁의 세계적 영향’이라는 보고서를 냈다. 이 보고서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영향으로 전 세계 94개 국가의 약 16억 명이 식량, 에너지, 생활비 등 적어도 한 가지 위기에는 노출돼 있다고 했다. 그중 약 12억 명은 악재의 동시 발생으로 엄청난 파괴력이 발생하는 ’퍼펙트 스톰‘ 상황에 놓여 있다고도 했다. 보고서는 2022년 말에는 식량 부족을 겪는 세계인이 전년보다 4,700만 명 더 늘어서 3억 2,300만 명에 달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런 상황은 빈곤이 개인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님을 말해준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사회적으로, 세계적으로 재난이 닥치면 평범한 사람들은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 놓이게 되고 그중 빈곤층이 가장 먼저, 그리고 크게 피해를 입는다.
국가의 부와 개인의 빈곤
빈곤은 개인의 책임인가, 아니면 사회의 책임인가? 이에 대한 상반된 견해가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나 단언컨대 현재 우리 사회의, 그리고 세계의 빈곤은 개인의 책임이 아니다. 코로나19 대응을 위한 국가의 셧다운 명령으로 가게를 닫고 직장을 잃은 사람들이 빈곤층으로 전락한 건 그들의 책임이 아니다. 우크라이나 전쟁 여파로 물가가 급등하고 상대적으로 적어진 수입으로 인해 빈곤층이 된 건 그들의 책임이 아니다. 코로나19나 우크라이나 전쟁 같은 극단적인 상황이 아니라도 사례는 많다. 우리 사회 청년들이 빈곤층이 되는 건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일할 의지가 있고 일하기 위해 계속 스펙을 쌓아도 일자리가 없고, 제대로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일자리를 찾기 힘든 건 그들의 책임이 아니다. 노인들이 스스로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일자리를 찾아도 결국 폐지수집 같은 일밖에 할 수 없고, 일한만큼 수입을 얻지 못하는 것 또한 그들의 책임이 아니다.
가장 큰 원인은 사회의 구조적 문제다. 현재의 세계에서는 국가의 부가 증가해도 빈곤층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선진국이나 개발도상국 할 것 없이 부유층과 빈곤층 사이 불평등은 더욱 심해지고 있다. 이 문제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게 자산 및 소득 불균형이다.
토마스 피케티 등 세계 유수의 경제학자들이 참여하는 세계불평등연구소(World Inequality Lab)가 지난해 12월 발표한 세계불평등보고서 2022(World Inequality Report 2022)에 따르면 코로나19를 거치면서 세계 불평등은 악화됐다. 2021년 말 현재 세계의 상위 10%는 전 세계 자산의 75.5%를 차지한 반면 하위 50%가 차지한 비율은 2%에 그쳤다. 하위 10%가 차지한 비율이 2%여도 기함할 지경인데 무려 세계 인구 50%가 차지한 자산 비율이 고작 전체의 2%란 얘기다. 코로나19 발생 이전인 2019년에 비해 상위 10%가 차지한 자산 비중은 0.4% 정도 증가했지만 하위 50%의 비율은 그대로였다. 상위 10%와 하위 50%의 자산 차이는 190배에 달했다. 특히 코로나19 상황에서도 세계 부호들의 자산은 증가했다. 소득 불평등 또한 세계적으로 나빠졌다. 상위 1%는 전 세계 소득의 19.3%를, 상위 10%는 52.2%를 차지했다. 반면 하위 50%가 차지한 소득 비율은 8.4%에 불과했다.
한국의 상황도 예외는 아니었다.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상위 1%는 한국 사회 전체 자산의 25.4%를, 상위 10%는 58.5%를 차지했다. 반면 하위 50%가 차지한 비율은 5.6%에 불과했다. 소득 불평등 지수 또한 좋지 않다. 한국의 소득 불평등 지수는 세계 평균보다는 나은 편이지만 상위와 하위의 소득 격차는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크다. 상위 1%는 한국 사회 전체 소득의 14.7%를, 상위 10%는 46.5%를 차지했다. 상위 10%의 소득은 하위 50% 소득의 14배에 달했다. 이것은 프랑스의 7배, 이탈리아의 8배, 영국의 9배, 독일의 10배보다 월등하게 높은 수치였다.
자산 및 소득 불균형은 국가 경제 성장을 통해 가장 큰 이익을 보는 건 기업이나 부자 투자자들이고 개미처럼 일하는 사람들은 제대로 혜택을 보지 못한다는 걸 보여준다. 물론 기업이나 돈을 대는 투자자들이 있어야 경제가 성장하고 일자리도 창출된다. 그러나 이것은 기업이나 투자자가 이익을 가장 많이, 또는 대부분 가져가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일반 노동자나 소비자도 제 역할을 한 것에 대한 보상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그리고 세계의 경제 구조는 기업의 수익 창출을 가능하게 하는 노동자나 소비자의 역할보다 기업과 투자자의 역할과 이익에 호의적이고 관대하다.
경제 침체 상황에서도 기업과 부자들의 이익은 보호되고 노동자와 소비자의 이익은 후순위로 밀려난다. 그런데도 낙수 효과 이론(trickle-down theory)이 주장되곤 한다. 이것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주장에서 시작된 것으로 그는 고소득자들이 내는 세금을 대폭 깎아주면 그들의 투자 의욕이 높아지고 그 결과 더 많은 부가 창출될 것이라고 했다. 부자들이 부를 더 축적해 소비가 늘면 그로 인해 일자리가 늘어나 많은 사람의 수입이 증가할 것이라는 논리였다. 이런 논리로 레이건 정부는 부자들의 세금을 깎아줬고, 반면 빈곤층에 대한 보조금은 삭감하고 최소임금을 동결했다. 부자는 더 부자로 만들고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하게 만드는 이 이상한 논리는 그후 미국 경제 정책의 기본 신념으로 자리를 잡았다(장하준 지음·김희정 옮김.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 부·키, 2014, pp.96-97) 참고).
실패한 논리라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이 논리는 지금도 힘을 발취하곤 한다. 그래서 기업의 세금을 깎아주고 임금을 동결시키면 투자가 늘어나고 그 결과 일자리가 늘어난다는 논리를 펴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자기 이익이 우선인 기업은 돈이 있어도 국가 경제를 위해 투자를 하지도, 직원을 더 뽑거나 임금을 올리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낙수 효과를 강하게 주장하는 경제 정책과 정치적 주장이 여전히 힘을 발휘하면서 구조적 문제를 만들고, 그 결과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건 불안정한 직업에 종사하면서 저임금을 받는 노동자들이다. 그들은 열심히 일해도 가난을 벗어날 수가 없다. 기업과 돈 많은 투자자들을 우선적으로 지원하고 보호하면 국가의 부는 늘겠지만 그것이 개인의 빈곤을 해결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자산 및 소득 불평등을 심화시킬 뿐이다.
빈곤 앞에서 공존을 생각하다
가난하다는 건 사는 게 힘들다는 의미다. 그러나 빈곤이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은 될 수 없다. 수십 년 전의 가난은 보편성을 가지고 있었다. 모두가 가난했기 때문에 가난이 개인이나 가족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국가의 부가 늘고 돈이 흔한 세상이 되면서 경제 수준이 개인이나 가족을 평가하는 잘못된 기준으로, 그리고 누군가를 하찮게 대해도 되는 핑계로 자리를 잡았다.
초등학생들은 아파트 거주와 일반주택 거주로, 그리고 아파트 평수로 친구를 평가하고 어울릴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한다. 청년들은 대기업에 다니는지, 중소기업에 다니는지, 또는 자유직업인지에 따라 그 사람의 능력과 미래를 판단한다. 일반 분양아파트 단지에 사는 학부모들은 자녀들을 일반주택이나 임대아파트 아이들과 같은 학교에 보내기 싫어서 교육청에 새 학교를 지어달라고 요청하기도 한다. 이 모든 일은 자기와 비슷한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은 평범한 욕구를 드러내는 것 같지만 사실은 가난한 사람들과 어울리기 싫다는 의사와 그들에 대한 무시를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지난해 12월 국가인권위원회는 ’2021 국가인권실태조사‘를 발표했다. 2019년 첫 조사 이후 세 번째 조사 결과였다. 조사에 의하면 응답자 중 41.8%가 우리 사회에 인권침해가 심각하다고 답했다. 차별이 심각하다는 응답도 47.4%였다. 특이한 내용은 인권침해와 차별을 받는 가장 취약한 집단(복수응답)으로 35.6%가 경제적 빈곤층을 꼽았다는 점이다. 그 다음으로는 장애인(32.9%)와 이주민(22.3%), 학력.학벌이 낮은 사람(16.7%) 순이었다. 이 조사 결과는 빈곤을 한 사람의 인격과 품성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많다는 씁쓸한 현실을 보여준다.
빈곤은 개인의 책임이 아니다. 흔히 사람들은 가난해지는 이유가 개인이 노력하지 않고 창의성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내가 세계 곳곳을 다니면서 목격한 건 가난한 사람들이 가장 열심히 창의적으로 일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야 한푼이라도 더 벌고 가족을 먹여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가난한 이유는 단순히 임금이 높지 않기 때문이고 일할 기회를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국가 경제 구조가 열심히 사는 그들을 돌보지도, 최우선으로 보호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빈곤층은 국가 경제가 발전해도 가장 마지막으로 혜택을 보거나 거의 혜택을 보지 못한다.
몇 년 전에 한 청소년 독서모임으로부터 빈곤에 대한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청소년들에게 빈곤에 대해 얘기할 때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글을 읽거나 강의를 듣는 아이들 중에 가난한 아이들도 있을 것이기 때문에 상처를 받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몇 날 며칠을 고민하다 쓴 내용은 가난은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아니고 돈이 많고 없고에 상관없이 좋은 시민이 되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좋은 시민이라면 자신이 부유층이든, 중산층이든, 빈곤층이든 상관없이 누구나, 특히 가난한 사람이 편견이나 차별을 받지 않고 권리를 누리며 사는 공존의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무엇보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가난해지는, 다시 말해 노동에 대해 제대로 보상을 받지 못하는 사회 구조를 지적하고 바꾸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빈곤층이나 저임금을 받는 사람들을 능력이 없다고 탓하지 않고 적어도 그들이 일한만큼은 정당하게 대가를 받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나아가 그들에게 일할 기회를 주는 사회적 투자와 정책이 이뤄지는지 감시해야 한다. 그것이 함께 사는 안전하고 행복한 사회를 만드는 길이다. 빈곤이 사라지지 않는 세상에서 우리가 진지하게 생각할 건 결국 공존이다.
* 위 글은 <월간 법무사> 8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