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 트리와 평화
성탄 트리가 또 말썽이다. 국방부가 말썽 많았던 애기봉 성탄 트리를 철거한 자리에 임시 성탄 트리 설치를 허락했다. 성탄 트리를 설치하겠다고 요청한 단체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이하 한기총)'다. 거창한 이름과는 달리 이 단체는 진보나 보수를 가리지 않고 대다수 기독교인들로부터 '민폐 지존'으로 취급받고 있는 단체다. 금권 선거 운동 스캔들이 난 뒤 기독교계에서 해체 요청이 들끓었고 그후 주요 교단들은 모두 탈퇴했다. 그런데 이 한기총이 애기봉 등탑 철거 자리에 9미터 높이의 임시 성탄 트리를 설치하겠다고 한 것이다. 한기총은 '남북 평화'를 위해서라고 주장했고 국방부는 냉큼 '남북 평화'를 위해서고 '종교 활동'이니 허락하겠다고 했단다. 뭐 이런 가식이 있나 싶다. 애기봉 성탄 트리가 그동안 북한을 자극해서 남북 평화에 심각한 위협이 됐었고 성탄 트리를 설치하겠다는 것이 순수한 종교 활동이 아니라 북한을 자극하겠다는 것임이 뻔히 보이는데 말이다. 물론 그 뒤에는 언론과 여론의 관심을 받아 자신의 존재를 과시해 보겠다는 한기총의 얄팍한 전략도 숨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기독교 목회자들이 성경의 평화를, 그리고 기독교 절기에서 가장 중요한 성탄절을 사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악용하는 셈이니 참으로 기막힌 일이다.
임시 성탄 트리를 허락한 국방부는 더 문제다. '국방부'는 명칭 그대로 다른 나라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일을 주업으로 삼는다. 거기에는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일도 포함된다. 북한이 노골적으로 불편함을 드러내고 협박까지 하면서 철거를 요구해온 성탄 트리를, 그것도 굳이 임시로까지 설치하도록 허락한 것은 나라와 국민을 지키는 국방부의 임무와 모순된다. 성탄 트리 때문에 안전에 위협을 느낀 주변 주민들이 줄곧 성탄 트리 설치 중단을 요구한 것은 완전히 묵살했다. 사실 국방부가 성탄 트리 설치를 허락했지만 내용을 보면 국방부의 업무와 상관없는 이유로 허락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남북 평화'니 '종교 활동'이니 하는 것은 국방부의 주업무와는 상관없기 때문이다. 이쯤되면 그 속내가 아주 궁금해진다. 혹시 노후한 애기봉 철탑 철거 소식에 '파란집'에 계신 분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자 그 심정을 달래주기 위해 특유의 과도한 충성심을 발휘한 것이 아닌가 의심이 가기도 한다. 뭐 증거는 없다. 다만 워낙 국방부가 줏대가 없이 정권 비위 맞추기에만 열심이니 그런 생각까지 든다는 얘기다.
한기총도 국방부도 성탄 트리 설치를 '평화'로 포장하고 있다. 평화학을 전공했고 하는 일이 '평화연구'와 평화교육'인 내게는 그런 말을 듣는 것 자체가 참 불편한 일이다. 평화를 너무 심하게 왜곡하고 있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그들이 말하는 평화는 단어만 같을뿐 전 세계가 공유하는 보편적 평화는 아니라는 것이다. 평화가 왜곡되는 상황이 워낙 많다보니 뭐 그리 놀랄 일도 아니지만 말이다. 어쨌든 평화의 기본은 관계 속에서 정의되고 성취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평화는 평화로운 관계가 전제돼야 하기 때문에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선언하거나 주장할 수 없다. 평화는 그러므로 항상 상대가 있고 상대와의 관계 속에서 정의되고 선언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한기총과 국방부가 말하는 평화는 상대가 없는 평화고 평화로운 관계가 전제되지도 고려되지도 않은 평화다. 남북평화를 위한 것이라면 북한도 성탄 트리를 보고 평화를 생각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부셔버릴 생각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연히 평화가 아니다.
평화를 얘기할 때 가장 중요하고 민감하게 고려돼야 하는 것은 '누구의 평화인가?'이다. 평화는 왜곡되기 쉽다. 좋은 말이니 누구나 쉽게 갖다 쓰고 제 맘대로 얘기하지만 그로 인해 왜곡되고 악용될 가능성도 많이 생기는 것이다. 그중 가장 심각한 것은 힘 있는 자에 의한 왜곡과 불손한 의도를 가진 자에 의한 악용이다. 그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고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평화를 강요하고 그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억압한다. 왜곡과 악용의 가장 큰 문제는 힘 없는 사람들의 희생을 야기한다는 것이다. 애기봉 성탄 트리도 힘 없는 주변 주민들의 희생을 강요한다. 그곳의 성탄 트리는 사실 평화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북한을 겨냥해 설치하는데 목적 자체가 북한을 자극하고 속을 뒤집어 놓으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북한의 속을 뒤집어놓은 결과 생기는 피해는 고스란히 주민들에게 돌아간다. 그곳의 성탄 트리가 정말 평화의 트리가 되려면 최소한 주변 주민들에게 트리에 붙은 작은 전등 하나만큼의 평화라도 전할 수 있어야 한다. 종교에 상관없이 주민들이 성탄 트리가 서 있는 동안 한줌의 평화라도 실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애기봉의 성탄 트리는 평화는 고사하고 주민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무기' 역할을 해왔다. 성탄 트리를 세우는 사람들은 점등식 후 쏜살같이 빠져나가면 그만이지만 주민들은 그 환한 불빛에 자극받은 북한이 언제 어떻게 위협을 가할지 노심초사해야 하는 것이다. 올해도 그런 일이 반복될까 주민들은 벌써 걱정이 태산이라는데 다른 사람의 평화를 위협하면서 평화를 지껄이고 있으니 정말 어불성설이다.
아직 시간은 남았다. 그동안 반대 여론이 형성돼 애기봉에 성탄 트리가 만들어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렇지만 현재로선 그럴 가능성이 낮아 보인다. 일단 결정을 했으니 한기총과 국방부는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이를 악물고 성탄 트리를 설치하려고 할 것이다. 반대 여론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무슨 '성전'이라도 치르듯 밀어붙일 것이다. 그러면 모금이 더 잘될 수도 있다. 그러니 그들에겐 손해볼 일이 하나도 없다. 결국 올해 성탄절에도 한반도에는 '땅에는 평화'가 이뤄지긴 힘들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