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의 정치, 힘의 예산
'힘'은 이런저런 이유로 논란의 중심에 서곤 하는 단어다. 평화갈등연구에서 힘은 아주 민감한 단어고 핵심 개념이기도 하다. 힘이 폭력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사람들 사이의 폭력은 힘의 차이를 악용한데서서 비롯된다. 힘은 평화적 문제해결을 방해하곤 한다. 힘 있는 사람은 대화보다는 억압과 강요를 통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획득하려 한다. 때문에 다양한 사람들이 잘 문제를 해결하면서 평화롭게 살기 위해서는 힘을 경계해야 하고 힘의 악용을 막아야 한다.
힘이 가장 큰 힘을 발휘하는 영역이 정치권이다. 국회의원은 힘이 있어야 당선이 되고, 권력을 잡으며, 잡은 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 정부는 힘이 있어야 자신이 원하는 정책을 밀고나갈 수 있다. 그렇다면 그 힘의 근원은 어디인가? 민주주의 사회에서 힘의 근원은 이론상 국민이다. 그런데 국민이 힘을 발휘하는 때는 선거철 뿐이다. 그외의 때에 국민은 아무런 힘도 쓸 수 없는 '종이 고양이' 정도다. 맘에 들지 않는 일이 벌어지면 조금 소리를 내보지만 워낙 갸날프고 처량해 정치인들은 그 목소리에 귀를 전혀 기울이지 않는다. 때론 짜증을 내기도 한다. 선거철 외에 힘은 온전히 정치권에 집중된다. 대통령, 국회의원, 장관, 정부부처 등이 그 힘을 국민들을 대상으로 휘두른다. 재밌는 것은 이 역전 현상을 많은 국민들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하긴 그것이 혈압 올리지 않고 '잘 먹고 잘 사는' 길인지도 모르겠다.
요즘 국회와 정부는 예산을 심의하고 조정하느라 난리다. 몇년 전만 해도 정부 예산이나 예산 조정 등이 별 뉴스거리가 되지 못했다. 그런데 요즘엔 예산을 둘러싸고 국회 내에서 벌어지는 온갖 에피소드들이 뉴스를 통해 전해진다. 예산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높아질테니 천만다행이다. 그런데 나를 포함한 국민들의 자족은 그냥 여기까지다. 국회의원들이 자기들끼리 앉아서 하는 예산 심의와 결정에 압력을 넣을 방법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실제 칼자루를 쥔 예결특위 예산안조정소위는 기자도 한 명만 남겨 놓고 모두 내보낸다니 언론도 뒷얘기나 보도할 뿐이다. 뭐 이런 싸가지없는 일이 있나 싶지만 당선되고 나면 부여받은 힘을 맘껏 활용하고 온갖 머리를 써 악용하는 국회의원들을 힘을 써본 경험이 없는 평범한 국민들은 이겨볼 방법이 없다.
힘의 정치가 있듯이 힘의 예산도 있는게 분명한듯 싶다. 뉴스에 등장하는 '박근혜표 예산'이니, '선심성 예산'이니, '쪽지 예산'이니 등등의 말은 모두 힘을 내포하고 있다. 그런 예산을 들이밀고 밀어붙일 수 있다는 것은 그럴만한 힘이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물론 들리는 얘기로는 예산안조정소위 야당 의원들이 대통령이 미는 새마을운동 예산이나 DMZ 평화공원조성 예산 등을 거부하고 있다지만 여당이 야당의 구미에 맞는 다른 예산과 맞바꾸자고 협상안을 제시하면 '대통령 예산'을 허락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기본적으로 국민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자신과 당의 이익을 위해 예산을 조정하니 말이다.
국회의원들은 쪽지 예산이나 선심성 예산을 들이미는 이유가 국민을 위해서라고 우길지 모르지만 그것을 믿는 순진한 국민은 없다. 결국 그것이 자신의 다음 선거를 위한 것인줄 모두가 안다. 정부가 제출한 내년도 예산이 상임위를 돌아오니 애초 예산보다 15조원이나 늘어 있었다. 그런데 그중 토목관련 예산이 거의 반인 7조원이란다. 토목, 다시 말해 도로, 다리, 철도 등 각종 건설사업에 쓰이는 예산인데 이것이 이른바 지역구를 위한 선심성 예산이다. 국회의원들에게는 다음 선거를 위한 일종의 투자인 셈이다. KDI 연구 자료에 의하면 큰 규모의 토목사업을 할수록 재선 확률이 높아진단다. 그렇지만 이건 아주 이상하다. 국회의원들이 자기 돈을 쓰는게 아니라 세금으로 자기 재선을 위한 투자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그것이 지역구민들의 희망사항일 수도 있다. 그런데 지역에 반드시 필요치 않아도 생색을 내기 위해 하는 일인 경우가 더 많다는게 문제다. 그래도 국민들은 눈에 보이는 토목사업을 하고나면 고맙고 일 잘한다고 다시 뽑아준다. 도대체 세금으로 다들 뭐하는 짓인가 싶다.
힘으로 정치를 하고, 그 힘으로 예산을 따내고, 다시 그 힘으로 재선에 성공하고, 이 반복되는 순환의 고리에 국민들이 비집고 들어갈 자리는 없다. 국민들은 그저 선거 때 표를 주는 소극적 역할만 할뿐이다. 그 다음에는 줄곧 약자로 힘을 가진 정치인들의 눈치를 보고 생활에 도움이 되는 예산이 편성되기를 바라며 근근히 버티고 살아간다. 예산을 심의하는 철이 되면 국회의원들은 물론 정부 부처들도 로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다. 자기 예산 홍보하고 협상하고 그런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국민들도 로비를 하고 협상도 해야할 것 같다. 무상복지나 무상급식 예산 편성 안해주면 다음 번에 표 안주겠다고, 그리고 선심성 예산 끼워 넣으면 낙선 운동도 불사하겠다고 아주 구체적으로 의사를 표현해야 할 것 같다. 그것도 안되면 쪽지 예산이나 선심성 예산 들이미는 의원들의 명단을 공개해 망신이라고 줘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우리 국민들은 이런 점에서는 너무 의연하고 예의바르다. 돈에는 그렇게 관심들이 많으면서 왜 정부예산에는 그렇게 관심이 없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국회의원들이나 공무원들은 자기 돈 아니라고 세금 펑펑 쓰고, 국민들은 자기 지갑의 돈 아니라고 세금 쓰는 정부예산에 관심이 없고, 누굴 탓해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