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갈등 이야기 /평화

남자의 군대, 군대의 남자

정주진 2014. 6. 25. 00:00

"총기 난사에서 생포까지....긴장의 42시간 40분". 한 뉴스의 헤드라인이다. 지난 토요일부터 월요일까지 동부전선 최전방에서 일어난 총기난사 사고와 사망자 및 부상자 발생, 사고 병사의 도주, 자살 시도 및 생포의 과정 동안 온 나라가 긴장했다. 도주 병사를 찾는 동안 인근 주민들이 대피까지 했으니 전쟁에 버금가는 상황이 벌어진 셈이다. 또 다시 '군대 기강 해이', '병사 관리 소홀' 등의 질책이 나오는 가운데 내겐 '남자의 군대, 군대의 남자'란 다소 엉뚱한 문구가 떠올랐다.    

 

대한민국 남자에게 군대란 피하려고 몸부리쳐도 피할 수 없는 곳이다. 권력자와 부자를 부모로 둔 남자들은 피할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남자들은 평범한 부모를 둔 탓에 울며 겨자먹기로 군대에 간다. 그러면서도 '남자라면 군대는 다녀와야지'라는 진정성이 극히 의심되는 대사를 내뱉으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그런 군대가 남자들에게는 추억의 대상이 되곤 한다. 남자들이 모이면 빠지지 않는 것이 군대 얘기고, 그런 얘기를 간혹 억지로 들어야하는 여자들은 신체적, 정신적, 심리적으로 극도로 불안정하고 힘들었던 시절을 추억하는 남자들의 심리 상태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대한민국에서 군대는 남자의 것이다. 여군이 있긴 하지만 징병제에 따라 '국방의 의무'와 '입대의 권리'를 부여받는 것은 남자뿐이기 때문이다. 그런 군대는 남성성이 대세를 이루고, 남자들만의 세계며, 남자들만의 서열과 행동 방식이 절대적 힘을 가지는 곳이다. 그러나 남자의 군대는 사실 남성성이 왜곡되거나 철저히 짓밟히는 곳이다. 남성성의 장점이라 할 수 있는 진취성, 용기, 약자 보호 같은 것은 사라지고 힘의 악용, 지배, 약자 억압 같은 부정적이고 폭력적인 남성성의 분출이 이뤄지는 곳이 군대다. 때로는 비겁하고 졸렬한 적응이 정당화되는 곳이기도 하다. 몰상식이 상식이 되고 비겁함이 가장 현명한 처세술이 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폭력'이란 한 마디로 정리된다. 남자의 군대는 폭력성이 지배하는 곳이고 폭력이 가장 힘을 발휘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런 곳을 '추억'하는 남자들은 모두 이제는 그곳과 물리적 거리두기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즉 더 이상 군대가 자신의 삶에 직접 영향을 미치게 허락하지 않고 스스로 군대와 거리두기를 할 수 있는 남자들이다. 이것이 군대를 추억할 수 있는 이유가 된다.  

 

군대의 남자는 완전 상황이 다르다. 이들에게 군대는 현재의 삶이다. 군대의 남자들, 특별히 징집돼 현재 군복무 중인 남자들 중 군대를 좋아하는 사람은 장담컨대 거의 없는 것 같다. 이들에게 군대는 도살장에 끌려가듯 발을 들여 놓고 거꾸로 매달아도 간다는 국방부 시계가 꽉 차 탈출하기만을 기다리는 감옥과도 같은 공간이다. 자유는 '국방의 의무' 또는 '군대 기강'이라는 이름으로 깡그리 무시되고, 인간임을 확인시켜주는 생각, 의문, 질문 등은 휴가 때 사회에 놓고 오거나 실수로 가져왔다면 즉시 화장실에 버려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공간이다. 아마 이것은 인간에게 가해지는 가장 큰 폭력 중 하나일 것이다. 문제는 이런 극한의 폭력적 상황을 견뎌야 하는 남자들 대부분이 20살 전.후, 또는 기껏해야 20대 중반의 아주 어린 남자들이라는 것이다. 성년이라고 하기엔 좀 어리고 이제 갓 청소년 티를 벗고 사회의 맛을 조금 알 나이에 불과한 남자들인 것이다. 이들은 여전히 가족과 사회의 보호를 필요로 한다. 고등학교까지 거의 사회를 경험할 기회가 없는 한국사회의 현실을 감안한다면 군대의 남자는 아주 연약하고 때로 유리처럼 깨지기 쉬운 나잇대의 남자들인 것이다.

 

총기 난사 사고가 일어나자 여야는 모두 군대의 기강이 해이해졌다고 질타했다. 하지만 징집제로 유지되는 한국 군대의 근본적인 문제를 얘기하는 목소리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북한이라는 적을 마주하고 있는 상황을 감안해서지만 아직 성숙되지 못하고 배경과 인성이 천차만별인 남자들을 한 공간에, 그것도 억지로 끌어와 집어 넣고 그들이 잘 어울려 살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비현실적인 바람이다. 그래서 억압이 이뤄지고 폭력적 환경이 만들어지는 것이지만 그런 것으로 인간의 자유로운 본성을 관리하는 것에는 당연히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거기에 더해 대한민국의 군대는 적을 마주한 특수한 상황에서 어떤 사회 조직보다 많은 기득권을 부여 받고 그에 따라 감시의 사각지대에 머물러 있는 현실적 문제가 있다. 이제는 대부분의 공공기관조차 감시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군대는 감시에서 철저히 제외돼 있는 것이다. 그러니 간식비 정도 되는 월급을 받으며 인생의 황금기를 바치는 병사들의 기본 인권과 복지는커녕 그들에게 온갖 폭력을 가하는 군대가 뻔뻔스럽게도 여전히 '신성한 군대'나 '국방의 의무' 같은 씨알도 안먹힐 군사독재시절 구호를 국민들에게 들이대고 있는 것이다.

 

결국 문제는 군대에 가기 싫은 사람들에게, 때로는 극히 억압적인 군대 환경에 적응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군복무를 강제하는데서 기인한다. 그렇게 적응하기 힘들어하는 여리고 어린 남자들이 한계에 달해 분노를 표출하고, 총이 가까이 있으니 총기 사고를 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총의 개인 소유가 허락된 사회에서 총기로 인한 자살과 희생이 많은 이유와 같다. 군대가 자신의 자발적, 또는 직업적 선택이라면 문제는 달라질 것이다. 물론 이런 경우 병력 부족이 야기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지만 이것과 관련해서도 드는 의문이 있다. 과연 북한과의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현재 규모의 병력이 필요한 것인지, 아니면 이미 존재하고 있는 부대와 군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서인지 말이다. 일어나지 않을 전쟁을 상정하며 60만명 이상의 군병력을 항상 유지하고 있는 이유가 100만 이상의 북한군을 상대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병력의 질과 무기의 수준을 고려한다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사실 올해 3월 국방부는 상비병력을 현행 63만 3천여 명에서 오는 2022년까지 52만 2천여 명으로 단계적으로 감축한다는 계획을 확정했다. 북한과의 관계 개선이 전혀 이뤄지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단계적 병력 감축을 계획한다는 것은 지금의 병력 규모가 사실상 북한을 고려해도 지나치게 많다는 애기밖에 되지 않는다. 사실 이미 참여정부 때 단계적으로 병력을 50만명으로, 그리고 군복무 기간을 18개월로 줄인다는 계획이 있었지만 다음 정부에서 말짱 도루묵이 됐다. 결국 병력의 필요 규모와 복무 기간은 정치적 선택일 뿐이고 국방부는 자기 조직의 유지를 위해 정부 성향에 맞춰 딜을 하고 있는 셈이다.

 

예전에는 군인들에게 위문편지를 썼다. 나라를 지키는 것에 대한 고마움을 담아서 말이다. 지금도 군대가 국민을 보호해준다고 공식적으로는 말하지만 실제 그렇게 생각하는 순진한 국민들은 많지 않다. 북한이 적이라고는 하지만 실제 전면전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남북 긴장이 고조될 때조차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무런 동요없이 일상생활을 이어간다는 것이 그 증거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에게 군은 어떤 의미인지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징집돼 군대에 간 남자들이 평소 하는 주업은 상상속의 전쟁에 대비한 훈련과 각종 '삽질'이고, 가끔 재난 상황에 동원돼 봉사하는 것이 그마나 보람있는 일이다. 그런 일들에 팔팔한 청년들이 온갖 억압과 폭력을 참아내고 때로는 인간성까지 포기하며 자기 삶을 온통 바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사는 많은 '군대의 남자'들을 위해서라도 힘들어도 근본적인 문제는 얘기하고, 기득권을 계속 유지하고 있는 군조직에 대해 끊임없이 문제 제기를 해야 한다. 나아가 미래를 내다보고 징집제의 실효성과 단계적 변화의 가능성까지 고민해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