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갈등 이야기 /평화

혐오를 정당화하는 담론들

정주진 2025. 5. 8. 14:41

417일 윤석열 지지자들로 구성된 자유대학이 건대입구역 인근에서 집회를 열었다. 이들은 집회를 마친 뒤 몰려다니다 중국인이 운영하는 상점 앞에서 빨갱이는 대한민국에서 빨리 꺼져라등의 노래를 부르며 행진했다. 이어 종업원들과 충돌했고 한 가게의 중국인 점원은 병원으로 이송됐다. 12.3 비상계엄 뒤 중국인 혐오를 확산시킨 극우 시위대가 중국인들이 밀집된 지역에서 주민들과 처음으로 직접 충돌한 것이다. 19일에는 서울 도심에서 같은 자유대학종북 좌파 간첩 빨갱이 매국노는 다 죽이자는 섬뜩한 구호가 적힌 현수막을 들고 집회를 열었다. 이들은 행진을 하며 반국가세력 척결반국가세력 모두 디질 때까지등의 가사가 담긴 노래를 소리높여 불렀다. 집회를 마친 후에는 무리를 지어 활보하며 계속 노래를 불렀다. 12.3 비상계엄 뒤 극우 세력은 정치적 입장이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고 자신들이 적이라 딱지를 붙인 사람들에게 온갖 혐오의 말과 협박을 쏟아붓고 있다. 극우 세력이 원하는 건 하나다. 자신들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 그리고 자신들이 싫어하는 사람들을 모두 제거하는 것이다. 이들은 이런 목표 달성을 위해 물리적 폭력을 동원하는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그런 폭력을 조장한다.

 

극우단체인 자유대학의 도심 집회와 중국인 밀집 지역에서의 충돌은 우리 사회 극우 집단의 혐오와 행동이 위험한 형태와 수준에 도달했음을 보여준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누군가를 죽이겠다는 현수막을 든다는 건 사회적 규범을 깨는 것이다. 그런 현수막을 들 수 있다는 건 사회적 제재가 작동하지 않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더 큰 문제는 그런 집회와 충돌이 반복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극우단체와 지지자들이 자신들의 혐오의 말과 행동에 대한 법적, 사회적 제재가 부재하다는 걸 확인했기 때문이다. 혐오의 말과 행동이 공공장소에서 표출되는 건 사회를 위기에 빠뜨리는 일이다. 그건 사회가 혐오를 제재하지 못한다는 것, 혐오가 정당화 과정을 밟고 있다는 것, 혐오 주장이 여러 담론 중 하나로 취급된다는 것, 혐오 대상에 대한 사회적 보호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 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혐오의 말과 행동이 비정상이 아니라 정상으로 여겨지고 공동체 일상의 한 부분으로 정착되고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12.3 비상계엄 뒤 우리 사회 혐오는 극에 달했다. 그동안 성소수자, 빈곤층, 여성, 탈북민, 난민, 외국인 노동자 등으로 향했던 혐오는 탄핵 찬성 국민에게 집중됐다. 그러나 사실 이 모든 혐오는 연결되어 있고 혐오의 말과 행동 또한 비슷하다. 혐오를 표출하는 세력과 사람들이 혐오를 정당화하기 위해 주장하는 것 또한 근본적으로 같다. 그들은 사회적 규범을 깨는 혐오를 정당화하기 위해 여러 담론을 만든다. 이런 정당화 담론은 인간 존중과 공존 사회를 거부하는 혐오를 사회를 위한 것으로 포장하고 사회 구성원들의 지지와 나아가 참여를 끌어내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혐오를 정당화하는 담론 중 가장 일반적인 건 안전을 강조하는 담론이다. 혐오를 표출하는 사람들은 혐오 대상으로 인해 사회가 안전해지지 않으므로 그들을 제재하고 나아가 제거해야 사회가 안전해진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안전은 자신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전체 사회, 그리고 미래세대를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많은 사람이 이런 주장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 지지를 표하기도 한다. 또 다른 중요한 담론은 순수성의 강조다. 혐오를 표출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겨냥하는 혐오 대상이 순수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극우 세력이 반국가세력’, ‘빨갱이’, ‘간첩’, ‘매국노등의 용어를 쓰는 이유는 대한민국 국민으로 순수성이 없음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그것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순수성은 공격의 수단으로 동원된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국가와 사회가 순수하지 않은 사람들을 보호할 이유가 없고 그래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아이러니하게도 혐오 표출을 하는 세력과 사람들은 정의를 주장하기도 한다. 물론 그들이 주장하는 정의는 보편적 정의가 아니라 왜곡된 정의지만 이들에겐 자신들이 정의를 위해 행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이들은 세월호 참사, 이태원 참사 등 대형 사고 희생자와 가족을 위해 세금이 들어가는 건 정의롭지 않다고 주장한다. 개인의 사고에 국고를 낭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정의 담론을 순수성 담론과 연결하기도 한다. 순수하지 않은 사람들, 빨갱이’, ‘매국노’, ‘성소수자’, ‘난민등을 지원하고 그들을 사회의 구성원으로 취급하는 건 정의롭지 않다고 주장한다. 이 또한 정의와는 상관없는 주장이지만 이들의 목적은 자기만의 정의를 그럴듯하게 포장해 공론장에 던져 논란을 만드는 것이다. 또 다른 담론은 선택받지 못한 자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혐오를 표출하는 자들은 북한과 대결하고 있는 우리 사회가 우파’, ‘보수’, ‘애국자등을 선택했고 좌파’, ‘진보’, ‘매국노등은 선택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혐오의 대상이 되는 건 당연하고 사회에서 쫓아내거나 2등 국민으로 취급해 교육, 내지 교화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혐오를 표출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궁극적인 목표는 혐오 대상의 제거고 당장은 자신들의 심리적, 물리적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우선적인 목표는 자신들의 우월성과 정당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힘의 관계를 분명히 설정하고 억압을 정당화하는 시도를 한다. 단계적인 목표는 사회 담론과 지리적 영역의 확보, 그리고 공공서비스와 물적 자원의 이용과 관련해 점진적으로 혐오 대상을 축출하고 독점을 구축하는 것이다. 이런 목표 달성을 위해 이들은 혐오를 공론장으로 끌어내고 선제적 공격을 통해 충돌을 유도한다. 그런 다음엔 갈등을 조장하고 사회 안전안정을 빌미로 혐오 대상 퇴출을 시도한다.

 

혐오는 단순히 일시적인 감정 표출이 아니다. 혐오는 가치관과 세계관에 기반한 것이며 비록 왜곡된 것이지만 사상과 철학에 근거하고 있기도 하다. 나름의 튼튼한 토대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사회를 혼란에 빠뜨린 사건이 사라진다고 혐오가 함께 사라지는 건 아니다. 목표물, 다시 말해 혐오 대상만 바뀔 뿐이다. 그러므로 혐오를 줄이고 없앨 사회적 고민과 전략, 그리고 그에 부응하는 실행이 필요하다. 이와 관련해 가장 현실적으로, 그리고 단기적으로 설정할 수 있는 목표는 혐오를 공론장에서 퇴출하고 소수 집단의 내부 담론으로 가두는 것이다. 이를 통해 적어도 혐오가 확산하고 선량한 피해자가 늘지 않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혐오가 발을 붙일 수 없는 사회 환경과 법적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이는 사회가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되는 장기 프로젝트가 되어야 한다.